잔뜩 멋내고 차려입은 관객들은 축제의 볼 거리다. 잘츠부르크 축제 주공연장인 대극장앞 호프슈탈거리. 멀리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보인다@SF/Kolarik Andreas

클래식의 향기가 스민 도시를 천천히 거닐며 음악가들이 남긴 선율과 그 사이사이로 흐르는 예술의 숨결에 귀 기울여봅니다. - 편집자 주

여름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가면 늘 묵는 숙소가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 촬영지로 유명한 슐로스 레오폴츠크론 호텔이다. 폰 트랩 대령과 일곱 남매가 사는 집으로 나온다. 영화 속 황금빛 화려한 무도장은 이 저택 2층 ‘베네치안 살롱’을 모델 삼아 할리우드에서 세트를 만들어 촬영했다.

페스티벌 극장에서 2.5㎞ 떨어진 이 호숫가 숙소를 찾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곳이 원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만든 세 주역 중 하나인 막스 라인하르트(1873~1943)의 저택이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는 1920년 8월 22~29일 잘츠부르크 대성당 광장에서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연극 ‘예더만’을 연출했다. 그해 첫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오페라·콘서트 없이 ‘예더만’ 한 작품뿐이었다.

20세기 전반 유럽을 대표하는 연극·오페라 연출가인 라인하르트는 1918년 저택을 구입, 현재 모습으로 개조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호프만스탈 같은 저명 음악가·연출가·작가들이 만나는 문화 살롱이 됐다.

라인하르트는 슈트라우스·호프만스탈과 환상의 3인조였다. 1911년 슈트라우스 오페라 ‘장미의 기사’를 협업한 데 이어 이듬해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도 성공시켰다. 이런 긴밀한 협력의 네트워크가 세계 최고의 여름 클래식 축제로 손꼽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산실(産室)이 됐다.

잘츠부르크 외곽 레오폴츠크론 호텔 앞 호숫가. 페스티벌 공동창립자 라인하르트 저택을 호텔로 개조했다. 호숫가 너머 해발 1853미터 높이의 운터스베르크 산이 보인다. /김기철기자

◇페스티벌 공동 창립자 막스 라인하르트

1921년 모차르트가 열두 살 때 쓴 40분짜리 단막 오페라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을 올리고, 빈 필하모닉과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차르트 교향곡·협주곡 등을 연주하는 콘서트가 추가되면서 요즘 같은 클래식 축제가 됐다. 축제는 지금도 ‘예더만’으로 시작한다.

라인하르트는 유태인이었다. 1937년까지 ‘예더만’은 라인하르트 연출로 무대에 올랐으나 이듬해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독일은 저택을 몰수했고, 라인하르트는 종전을 보지 못한 채 미국에서 숨졌다. 전후 저택은 라인하르트 부인에게 반환됐다.

레오폴츠크론 성(城)은 2014년 호텔로 개장했다. 호텔 2층 라인하르트의 서재엔 손때 묻은 고서가 가득하다. 중국풍으로 꾸민 그린 살롱, 우아한 장식의 레드 살롱을 둘러보면 20세기 전반 유럽 엘리트층의 폭넓은 지적 분위기와 문화적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동창립자 라인하르트 저택의 서재. 1920~1930년대 음악가, 작가, 연출가들이 모이는 문화살롱 역할을 했다. 왼쪽 벽에 걸린 사진이 라인하르트./김기철기자

◇매주 다른 프로그램의 빈 필을 만난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1756~1791)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게트라이데 거리와 미라벨 정원을 거닐고 호엔 잘츠부르크 성을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모차르트 고향인 이곳에선 역시 오페라와 콘서트를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부활절 축제나 성령강림절 축제도 좋지만 메인은 여름 축제다. 세계 최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 악단으로 자리 잡고 오페라·콘서트를 이끌어간다.

올해는 에사-페카 살로넨, 안드리스 넬손스, 리카르도 무티, 프란츠 벨저-뫼스트, 야닉 네제-세겡 같은 기라성 같은 지휘자들이 빈 필을 이끌었다. 빈 필 연주를 매주 다른 프로그램으로, 그것도 실력파 마에스트로 지휘로 볼 수 있는 곳은 잘츠부르크밖에 없다.

올 여름 잘츠부르크 축제의 하일라이트인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 맥베스 부인으로 나선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이 왕좌를 차지한 남편 맥베스를 축하하며 노래하는 장면.©SF/Ruth Walz

모차르트의 숨결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모차르테움 재단 대극장이다. 20세기 초 건립한 800석짜리 아르누보 스타일 콘서트홀은 고풍스러운 장식과 세련된 분위기로 이름났다. 음향도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는 체임버 오케스트라나 실내악, 리사이틀에 최적화된 곳이다.

비발디 음악을 편집한 오페라 '호텔 메타모르포시스' © SF/Monika Rittershaus

◇‘맥베스’ ‘호텔 메타모포시스’… 스타들의 향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백미는 오페라다. 작년 도스토옙스키 원작 오페라 두 편(‘노름꾼’과 ‘백치’)이 화제를 모았다면 올해는 베르디·도니체티 같은 이탈리아 오페라는 물론 헨델·비발디·라모 같은 바로크 오페라와 헝가리 작곡가 외트뵈시의 체호프 원작 오페라 ‘세 자매’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해졌다.

지난달 8일 개막 공연을 올린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는 2023년 초연 때도 호평을 받은 수작이다. 개막일답게 유명 인사들이 참석하는 레드 카펫 행사와 사진기자들로 북적거렸다. 리투아니아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은 2017년 데뷔 이후 매년 축제 주역으로 나서는 ‘잘츠부르크의 디바’. 폴란드 연출가 바를리코프스키는 ‘악녀’의 대명사 격인 맥베스 부인 역에 설득력 있는 명분을 주려 했고 그리고리안은 그에 걸맞은 연기와 노래로 화답했다. 벨라루스 바리톤 술림스키도 고뇌하는 맥베스 연기를 제대로 해냈다. 필리프 조르당이 지휘한 빈 필은 베르디 음악의 진수를 보여줬다.

스타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나선 ‘호텔 메타모르포시스’는 비발디 음악을 재활용한 ‘파스티치오’ 오페라. 한 작곡가의 여러 음악을 편집하거나 여러 작곡가 작품에서 음악을 빌려와 새 작품을 만들어내는 양식이다. 호주 출신 세계적 연출가 배리 코스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가려 뽑은 에피소드를 솜씨 좋게 매만져 새 오페라를 창조했다. 생동감 넘치는 비발디 음악의 성찬은 기대 이상이었다.

두 개의 회전 무대를 끊임없이 돌리며 엘리자베스 여왕과 메리 스튜어트 자매의 갈등과 대결을 형상화한 도니체티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도 화제작. 소프라노 리세트 오로페사와 메조소프라노 케이트 린지의 불꽃 튀는 대결이 볼 만했다.

도니체티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 소프라노 리세트 오로페사(오른쪽)와 케이트 린지의 불꽃튀는 대결이 볼만했다. ©SF/Monika Rittershaus

◇한밤중 수놓은 슈베르트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밤 10시에 시작한 슈베르트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도 깊은 여운을 남겼다. 독일 바리톤 게오르크 니글이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건반악기 ‘스퀘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연주했다. 80명 남짓 들어가는 작은 방이었다. 알렉산더 게어겔리피는 성악가와 경쟁하거나 윽박지르지 않는 은은한 울림으로 연주했다. 니글은 커다란 수건으로 땀을 닦아가며 1시간 넘게 물방앗간 아가씨를 연모한 청년의 열정을 뜨겁게, 또는 읊조리듯 탄식하며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냈다.

45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올 잘츠부르크 여름 축제(7월 18일~8월 31일)에는 88국에서 온 25만6600명의 관객이 몰렸다. 이 도시 인구(15만2700명)보다 훨씬 많다. 오페라 티켓 최고가는 475유로(77만원)나 하지만 2만~3만원짜리 티켓으로도 지상 최고의 음악을 만날 수 있는 곳, 잘츠부르크 여름 축제를 일생에 한 번은 가볼 만한 곳으로 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