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쓰이기 전에 대학에서 퇴직했기 때문이다. 재직 기간 내내 시험은 오픈 북으로 치렀다. 학생들이 책, 스마트폰, 노트북 컴퓨터까지 보면서 정답이 없는 철학 문제에 답하는 방식이었다. 이해력과 논변 수준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논술형 글쓰기 시험을 학생들은 더 어려워했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철학을 비롯한 여러 질문에 대해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은 답변 보따리를 매끄럽게 풀어놓는다. 대형언어모델에 기초해 척척 대답하는 인공지능이 마치 만물박사처럼 보인다. 최신 모델 고급 기능은 고질병인 ‘환각’(거짓 정보)도 줄였다. 영어 질문엔 더 술술 대답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언어 장벽도 넘어섰다. 자료를 바로 번역해 주고 일정표까지 짜주는 ‘유능한 개인 비서’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챗GPT가 화제다. 소액 주식 투자를 실험하고 있는 친구는 챗GPT 실력이 증권회사 직원 못지않다고 한다. 의사 친구는 생성형 인공지능에서 얻은 지식으로 질문 공세를 펴는 환자들을 버거워한다. 회계나 법률 전문가들도 위기의식을 느낀다.
학교에선 단순 지식 전달의 의의가 사라졌다. 인공지능의 연산 능력과 암기력은 진작 인간을 넘어섰다. 인간 최고수를 압도한 알파고 이후 일변한 바둑계 풍경이 대표적이다. 인간 정신 능력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던 ‘바둑 신비주의’가 무너졌듯 지식 전수의 장으로서 대학도 실존적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은 인간 정신의 정점인 ‘창조적 글쓰기’는 못 해낼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천만의 말씀! 생성형 인공지능은 학술 논문은 물론 문학상을 받는 작품도 써낸다. 그림, 작곡, 동영상 제작 능력도 일취월장이다. 창조성의 본질을 근본부터 돌아보아야 할 지경이다. 할리우드에선 생존 위협을 느낀 영화·드라마 작가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나도 생성형 인공지능을 참고한다. 궁금한 게 생기면 그때그때 물어본다. 챗GPT는 자료 검색과 정보 교차 검증에 아주 유용하다. 평생 ‘나 홀로 작업’을 고수했는데 ‘유능한 조교’가 생긴 느낌이다. 인공지능은 잘 이용할수록 노동 생산성을 늘릴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기업에서도 고위직일수록 인공지능 이용률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인공지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이들의 ‘인공지능 격차’(AI Divide)가 가져올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것들’까지 깊이, 그리고 오래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챗GPT에 “너 같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게 무엇이지?”라고 물었다. 24초간 ‘생각’(thinking) 끝에 나온 챗GPT의 답변은 ‘생각하는 기계’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했다. 인간이 입력한 답변을 정리한 기계적 출력에 불과해 ‘고뇌하는 주체’의 흔적이 부재했다.
인공지능은 확률적 연산의 결과물이다. 지적 존재처럼 대화하는 시늉으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도 사람과 ‘인격적 교류’를 할 수는 없다. 챗GPT는 고해(苦海) 속 중생을 연민하는 인간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지 못한다. 우리와 달리 ‘몸’이 없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지식을 전달하는 ‘21세기 소피스트’인 척척박사 인공지능엔 치명적 한계가 있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며 스스로가 누구인지 ‘인식’할 수도 없다.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건 사랑과 공감이고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인공지능은 의미를 찾아 고투하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이런 인간적 행위들을 ‘실행’할 수 있을까? 챗GPT가 과연 ‘자유’를 위해 죽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인공지능을 불안과 고독을 치유하는 ‘새로운 신’으로 추앙하고 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