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나마 짧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숙소에 혼자 하룻밤 묵으며 근처를 산책한다’가 계획의 전부였기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었다. 숙소에는 막바지 여름휴가를 즐기는 가족이 많았다. 저절로 사람 구경(!)을 하게 됐다.
조식 뷔페를 먹을 때 맞은편 테이블에는 엄마·아빠·딸로 보이는 3인 가족이 앉았다. 부모는 사십 대 후반, 딸은 중학생쯤 돼 보였다. 들뜬 표정으로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나르던 가족들은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이어갔는데, 돌연 아빠는 딸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딸의 잇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밥 먹다 말고 딸의 입안을 헤집는 아버지의 모습에 못 볼 걸 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았지만 늘 있는 일인지 딸은 아빠에게 입안을 내어준 채 잠자코 있었다. 엄마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말없이 밥을 먹었다. 한참 ‘잇몸 대화’를 나누던 부녀는 잠시 후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갔다.
내 옆 테이블에는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앉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돼 보이는 아들이 접시에 음식을 담아 오자, 영양소에 대한 엄마의 강의가 시작됐다. 밥 먹을 때는 채소를 먼저 먹으면 좋다. 뷔페에서까지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면 되겠니. 빵이랑 과일은 나중에 먹지 그래 등등. 옆에 앉은 나조차 얹힐 정도였지만 아들은 엄마의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 역시 계획이 있었던지 아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영양학 강의를 멈추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4인 가족과 마주쳤다. 엄마로 보이는 여성은 20대로 보이는 딸의 배꼽 위로 올라오는 티셔츠가 신경 쓰였는지 뒤에 바짝 붙어 서서 딸의 상의를 잡아당겼다. 딸은 등 뒤를 향해 “아, 진짜!” “하지 마!”를 연발했지만 엄마는 굴하지 않고 딸의 티셔츠를 내리고 또 내렸다. 딸이 제발 부탁한다는 투로 “옷 늘어나” 하자 엄마는 ‘오히려 바라는 바다’라는 표정으로 딸의 티셔츠 끝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딸은 말했다. “더 짧은 걸로 갈아입을 거야!”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퇴실 절차를 마치고 로비에서 쉬다 가기로 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통창으로 보이는 도시 전경을 감상하며 차 한잔 하기 좋은 곳. 짧은 휴가의 감상을 정리하기에도 제격인 공간이었다. 잠시 후, 옆자리에 노부부가 앉았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남자 어르신은 혼잣말하듯 “커피 한잔 해야 되겠구먼” 하고는 일어섰다. “당신도 마실래?” 묻자 여성은 “싫어. 안 마셔”라고 했다. 잠시 후 남자 어르신은 종이컵에 든 커피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아내는 마치 벌에 쏘인 양 소스라치며 “싫어, 싫어, 안 마셔!” 했다. 남편이 굴하지 않고 “한번 마셔 봐. 맛 괜찮아” 하자 아내는 더 큰 목소리로 “안 마셔”를 열댓 번쯤 반복했다. 그쯤에서 그만두면 좋을 텐데 남편은 다시 한번 커피를 권했고 아내는 참지 못하고 속사포 랩을 쏟아냈다. “싫어, 싫어, 안 마신다고. 안 마셔, 안 마셔. 안 마신다니까. 아 됐어, 됐다고!” 이쯤 되면 관객으로서 이 무대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해지기 마련. 얼굴은 창밖을 향했지만 두 귀는 옆 테이블 쪽으로 활짝 열린 채 최종 승자가 누구일지 기다렸다.
잠시 후 남편이 다시 “아, 그러지 말고 마셔 봐. 맛이 괜찮다니까” 하자, 거절의 포효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뭔가를 쪼록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어르신이 만족스럽다는 투로 “어때?” 하자 여자 어르신은 화답했다. “맛은 괜찮네. 아, 안 마신다니까….” 뭘 드실 때마다 만담 공연을 펼치는 우리 부모님이 떠올랐다. “먹어 봐” 공격에 “안 먹어” 수비가 전부지만 50년째 공연은 계속되고 있다. 아무도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대결이다.
숙소 주변을 산책할 때는 나란히 속도를 맞춰 걸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부부들이 있었다. 활기차게 앞장서는 부모의 뒤를 입이 댓 발 나온 채 따라가는 청소년들 모습엔 조카들 생각이 나서 웃음이 흘렀다. 이런 데 왔으니 가족사진 좀 남기자는 누군가의 말에 지옥에 온 표정으로나마 협조하는 가족도 보였다. 각기 다른 가족의 모습은 눈앞에 펼쳐진 자연만큼이나 다채로웠다. 세상에는 가족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가 있었다.
짧은 휴가를 마친 후 나 역시 가족을 만났다. 보호자의 휴가로 이틀간 반려견 호텔에 묵어야 했던 개는 나를 보자마자 짖고, 점프하고, 빙글빙글 돌다가 얼굴을 핥는 걸 5분 넘게 이어갔다. 고작 이틀 떨어졌을 뿐인데도 온몸으로 맞아주는 개를 한참 쓰다듬었다. 반려견 호텔 직원은 말없이 선 채 이 순서가 언제 끝날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가족에게는 그들만의 소통 방식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외국어처럼 생소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모국어처럼 익숙한 것. 가족의 언어는 그 가족 구성원만의 것이기에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다 다른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무뚝뚝함에 가려진 마음은 배려, 관심, 사랑, 그리고 염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