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 나이면 애 둘은 있어야지. 이렇게 예쁜데 왜 아직도 혼자야? 본인도 좀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10년 차 직장인 한송이(가명·37)씨는 몇 달 전 회식 자리에서 들은 회사 대표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 하지만 억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2. “김 과장님은 머리가 좋지는 않으신가 봐요. △△대 나오셨다기에 굉장히 스마트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강욱(가명·35)씨는 거래처 직원에게 이 말을 들은 날을 ‘직장 생활 최악의 날’로 꼽았다. “그때 욕이라도 할 걸, 바보처럼 웃어넘긴 게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무례(無禮)’. 태도나 말에 예의가 없다는 뜻이다. 예의는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다시 말해, 무례는 사람다움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다. 안타깝게도 무례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회식 자리에서, 회의실에서, 심지어 친구나 가족 사이에서도. “결혼은 왜 아직이냐” “애는 왜 안 낳아?” “연봉이 그 정도밖에 안 돼?” 같은 선을 넘는 사적 질문부터 “살 좀 빼야겠다” “요즘 얼굴이 왜 그래” 같은 외모 지적, “그 실력으로 뭘 하겠어” “넌 왜 그렇게 무능해”라는 능력 폄하까지 다양하다. 이런 무례를 맞닥뜨릴 때 많은 이는 순간 당황해 억지로 웃어넘기거나 버럭 화를 내버리곤 한다. 그러곤 ‘그때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자책하며 후회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타인의 무례한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을 어지럽히고, 때로는 일상을 뒤흔드는 문제로 번진다.
◇직장인 100%가 경험
한국EAP협회와 비폭력대화연구소가 2022년 직장인 31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00%가 최근 6개월 동안 직장 내에서 무례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58.7%는 ‘반복적으로’, 41.3%는 ‘한두 번’ 겪었다고 했다. 대응 방식은 ‘참는다’(50.8%)가 가장 많았고, ‘시정 요청’은 13.7%에 불과했다. 2023년 직장갑질119·아름다운재단의 직장인 1000명 대상 조사에서는 여성 2명 중 1명(55.9%)이 ‘아가씨·아줌마 등 부적절한 호칭을 들었다’고 답했다.
무례는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다. 당하는 사람의 신체·정신 건강, 나아가 조직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가디 길람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 등의 2020년 연구에 따르면 무례한 언행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임명호 단국대 교수는 “무례는 분노, 감정 혼란, 자존감 저하를 야기한다”며 “대응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갈등이 커지고, ‘내가 너무 예민한가’라는 자기 비난으로 이어져 정신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준다”고 했다.
미 인적자원관리협회(SHRM)의 시빌리티 인덱스에 따르면, 올해 1~3월 미국 근로자들이 하루 동안 경험하거나 목격한 무례 행위는 총 2억800만건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직장 내 무례 행위로 미 기업들은 하루 약 21억달러 규모의 경제적 손실을 겪었다는 분석도 있다. 2022년 미 플로리다대 아미르 에레즈 교수 연구에서는 무례한 발언이 업무 수행 능력을 최대 44%까지 떨어뜨린다는 결과가 나왔다. 크리스틴 포래스 조지타운대 교수는 저서 ‘무례함의 비용’에서 직장 내 무례가 직원들의 사기를 꺾고 이직률을 높이며 회사의 이익을 크게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포래스 교수가 17국 근로자 800명을 조사한 결과, 상사로부터 무례를 경험한 직원의 66%가 실적이 하락했다.
◇무례 대처의 정석은
‘무례’라는 불청객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최근 가수 장윤정은 한 방송에서 자신의 남편을 ‘서브(sub)’라고 표현한 김진웅 아나운서의 발언을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상대가 웃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은 ‘농담’이나 ‘장난’으로 포장될 수 없습니다. 가족 사이에 ‘서브’는 없습니다.” 글은 빠르게 확산했고, 비판 댓글이 이어졌다. 김 아나운서에 대한 징계와 해당 방송의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까지 등장했다. 이후 장윤정은 사과받았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런 글을 남겼다.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앞날에 여유, 행복, 행운이 깃들길 바라겠습니다.”
장윤정의 대처는 즉각적이고 단호했으며 품격을 잃지 않았다. 불필요한 감정적 표현을 배제하고 ‘당신의 발언은 잘못됐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했다. 사과를 수용하는 성숙한 태도까지 보여줬다. ‘무례 대처의 정석’이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저자 정문정 작가는 “현명하고 세련됐다”고 했고, 이헌주 연세대 미래융합연구원 연구교수는 “틈을 주지 않는 단호한 대응”이라고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코미디언 김숙 역시 무례 발언에 잘 대응한 사례로 꼽힌다. 김숙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김구라에게 “얼굴이 남상”이란 말을 듣고는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어? 상처 주네?” 김구라가 농담이라며 사과하자 “괜찮아요”라며 미소 지었다. 그는 이후 한 강연에서 “친한 친구가 ‘뭐가 못나서 결혼을 못 하니’라고 물으면 ‘너처럼 살까 봐’라고 당당하게 얘기한다. 너무 못되게는 얘기하지 않더라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감정을 보이는 것은 금물
전문가들은 무례에 대응할 때 ①의도를 파악하고 ②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며 ③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문정 작가는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묻는 것을 추천했다. 문제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키고(“제3자가 듣는다면 오해하겠는데요?”),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하는 것(“제 외모를 지적하시는 건가요?”)도 중요하다. 상대가 사용한 단어를 그대로 돌려주면서(“지금 ‘한심하다’고 하신 건가요?”) 무성의하게 반응(“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하는 것도 좋다. 정 작가는 “중요한 것은 상대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헌주 교수는 “직접 붙어서 싸우거나 엄청나게 화내는 것은 독이 된다”며 “단호하게 경계를 세워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악의를 가진 무례한 사람을 늑대형과 사자형으로 분류한다. 늑대형은 은근슬쩍 남을 이용하거나 깎아내리거나 무시한다. “OO씨는 맹한 구석이 있어요”란 말을 들었다고 해보자. 감정을 폭발시키거나(“뭐라고? 당신 말 다했어?”) 인정하는 것(“맞아요. 하하”)은 금물이다. 정색하고 묻거나(“맹하다고요? 그게 무슨 의미예요?”) 똑같은 말을 돌려주는(“네. □□씨도 맹한 구석이 있어요”) 게 좋다. 사자형은 약한 사람을 노리는 공격적인 사람이다. 이런 부류엔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짧고 강하게 보여줘야 한다. “요즘 예민한 일 있어? 인상 쓰면 더 늙어 보여”란 말엔 “늙어 보인다고요? 지금 선 넘으셨어요”라고 분명히 말하는 식이다. 이 교수는 “초반에 ‘나는 가만히 당하는 사람이 아니다’란 것을 보여줘야 한다”며 “싸우는 게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될 땐 천천히, 눈치채지 못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독일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바르바라 베르크한은 “무표정, 무반응으로 대응하라”고 했다. 충격받거나 당황한 모습을 보이거나 상처 입은 표정을 보이면 상대방의 공격을 유효타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 “그래서요?” “뭐라고요?” “그렇군요” 같은 짧은 대답으로 ‘나는 당신 말에 관심이 없고,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다.
◇쓰레기는 받는 즉시 버려야
무례한 상황을 겪은 뒤 이를 계속 곱씹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부정적 사고가 고착될 수 있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정문정), 믿을 만한 사람 두 명에게 즉시 공유해 감정 분산하기(이헌주), 긍정적 생각으로 덮기(임명호) 등을 추천했다.
법륜 스님은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이 한 말로 지금 내가 괴롭다면, 그 말이 그 사람의 스트레스로 꽁꽁 뭉친 쓰레기라고 여겨보세요. 쓰레기는 받는 즉시 버려야 합니다. 남이 나에게 준 쓰레기 봉지를 안고 다니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