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각 지자체가 자체 제작한 홍보 영상에 등장해 랩과 춤, 노래 솜씨를 유감없이 선보인 Z세대 공무원들. 각 영상 모두 조회 수 200만 이상을 기록했다. 왼쪽부터 안동시 보육아동가족과 권해미 주무관, 군산시 고향사랑기부계 박지수 주무관, 울산 남구청 뉴미디어팀 이소희 주무관. /안동시·군산시·울산 남구청 인스타그램

“안녕하세요. 래퍼 주무관입니다. 무관무관주~ 내가 마카다(모두 다) 안동 랩으로 평정하러 왔다. 비트 주세요. I love 안동 찜닭, 안동 소주, 안동 식혜, 안동 참마, 하회탈 빵, 헛제삿밥, It’s good~.”

주황색 가발에 두건을 쓰고, 아이라이너로 눈 주위를 짙게 그린 채 랩을 하는 사람은 경북 안동시 보육아동가족과 권해미(29) 주무관. 지난달 31일 안동시에서 향토 음식 홍보를 위해 만든 1분 20초 남짓의 이 짧은 영상은 조회 수 222만회를 기록하며 ‘대박’이 났다. 권 주무관은 “올 초 안동시 미디어홍보팀에서 영상 출연 배우를 모집한다는 공문을 보고 지원했다”며 “한 달에 두 번 정도 유튜브나 쇼츠 촬영을 하고 있는데, 너무 재밌게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안동 푸드’ 영상은 랩 경연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 애청자이자 대학 때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권 주무관이 먼저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영상 아래엔 랩 원작자인 코미디언 이수지가 쓴 댓글(“안동♡ 사랑합니다”)뿐 아니라, “요즘엔 공무원 시험에서 실기도 보나요” “고향사랑기부금인가 그거 내야 할 듯” 같은 댓글 1300여 개가 달렸다.

춘천시가 과천시와 푸드테크 선도 도시 포럼 공동 유치를 알리며 만든 영상 속 한 장면. 록밴드 콜드플레이 콘서트에서 불륜 행각을 들킨 커플을 재치 있게 흉내 냈다. /춘천시 인스타그램

경직되고 변화 느린 조직으로만 여겨지던 공직 사회에서 Z세대 공무원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충주맨’이 쏘아 올린 변화다.

‘충주맨’은 2019년부터 충주시 유튜브인 ‘충TV’를 제작하는 김선태(38) 주무관을 말한다. 그가 2020년 코로나 국면 때 생활 속 거리 두기를 강조하며 찍은 ‘관짝 춤’ 영상은 유튜브 조회 수 1000만회를 넘겼고, ‘충TV’ 구독자는 26일 기준 88만명이 됐다. 충주시 인구 21만명의 약 4배. 충주맨은 지난해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9급 공무원에서 6급(지방 행정 주사)으로 승진했고, 올 1월부터는 신설된 충주시 ‘뉴미디어팀’ 팀장을 맡고 있다. 이제 전국 곳곳에서 충주맨의 뒤를 잇는 새싹들이 자라고 있다.

충주맨이 쏘아 올린 공

안동에 권 주무관이 있다면, 군산엔 이 사람이 있다. 군산시 공보협력과 고향사랑기부계 박지수(30) 주무관. 군산시에서 일한 지 2년 된 새내기지만, 카메라 앞에선 다르다. 그는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공무원이 투표 날 듣는 가장 공포스러운 말 톱(Top)4’ 영상에 출연했다. “신분증 두고 왔는데요.”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신데 같이 들어가도 될까요.” “잘못 찍었는데 투표 용지 다시 주세요.” “저는 00 찍었어요.” 이 영상은 그의 노련한 연기로 조회 수 600만회를 기록했다.

박 주무관은 “같은 과에 미디어홍보계가 있는데 재밌는 기획이 있어도 출연자가 없어서 못 찍는 경우가 많더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내가 먼저 ‘해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박 주무관의 MBTI는 외향적·개방적·솔직함의 대명사인 ENFP. 그는 “평소 친구들이랑 재미 삼아 상황극 같은 걸 많이 해본 게 자연스러움의 비결인 것 같다”고 했다.

지난 6월 공개돼 200만 조회 수를 기록한 ‘아메리칸 아이돌에 등장한 울산 공무원’ 영상도 또래 공무원이 주연이다. 울산 남구청 뉴미디어팀 이소희(30) 주무관. 미국 유명 프로그램인 ‘아메리칸 아이돌’의 가상 오디션장을 배경으로 금발 가발을 쓰고 분홍색 외투를 입은 이 주무관이 빠른 박자에 맞춰 노래한다. “I’m a hotpink girl in Namgu(나는 남구의 ‘핫핑크’ 소녀야)” “Everyone needs 수국축제(모두 수국 축제를 원해)”~. 울산 남구에서 해마다 6월이면 열리는 ‘장생포 수국 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영상이다. “공공기관이 달라졌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수국 축제는 확실하게 알겠다” 등 재밌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울산에 안 살아도 계정은 구독

이들의 활약상이 이어지면서, 해당 도시에 살지 않아도 지자체 소셜 미디어를 구독한다는 사람도 많아졌다. 울산 남구청 인스타그램의 경우 1년 사이 팔로어가 2배 이상 증가해 2만명을 돌파했다. 안동시는 3만7000명, 군산시 인스타그램은 2만5000명에 육박한다. 인플루언서급이다. 서울에 사는 회사원 한모(40)씨는 “아메리칸 아이돌을 소재로 찍은 울산시 공무원 영상은 정말 스무 번은 본 것 같다”며 “웬만한 유머 계정보다 재밌어서 팔로우(구독)했다”고 했다.

정작 영상을 만드는 공무원들은 영상이 지나치게 유머 위주로만 흘러가거나, 가십거리로만 남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장생포 수국 축제’ 영상을 기획한 울산 남구청 뉴미디어팀 남영식(41) 주무관은 “유튜버나 다른 크리에이터와 달리 우리는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며 “SNS상에 떠도는 밈(meme·유행 콘텐츠)이나 재밌는 소재는 많지만, 이를 우리가 홍보하려는 내용과 잘 접목시키면서도 공공기관으로서의 선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라고 했다.

2021년 남구청에 처음 뉴미디어팀이 만들어질 때 합류한 그는 독학으로 유튜브나 인기 있는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을 찾아 분석하고, 충주맨도 직접 찾아가 노하우를 배웠다. 유명 예능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내는 솔로’ 영상 등이 화제가 되면서 지난해 울산 남구는 ‘제17회 대한민국소통어워즈’에서 소셜미디어 대상을 받기도 했다.

특별한 보상은 없지만…

대부분 공무원 유튜버들은 영상 조회 수가 높다고 해서 인센티브를 받거나, 인사 고과에 특별히 가점이 부과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충주맨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할까. 안동시 권해미 주무관은 “일단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MBTI 검사를 하면 E(외향적 성향) 100%로 나온다. 평소에도 개사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랩 따라 하는 걸 좋아해서 촬영이 즐겁다. 더 열심히 해서 많은 분의 알고리즘에 안동시 영상이 수시로 뜰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군산시 박 주무관은 ‘보람’을 말했다. “보람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군산의 존재감을 심어준 것 같아 좋더라. 군산시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이왕이면 고향사랑기부도 군산시에 해주시면 좋겠다(웃음).”

울산 남구청 남 주무관은 “사실 우리 업무도 공무원들의 수많은 업무 중 하나”라고 했다. “다만 남들에게 보여준다는 특수한 업무이기 때문에 이슈가 되는 것 같다. 다른 공무원들과 똑같이 주어진 업무이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이다.”

원치 않는 차출은 피해야

지난 13일 박지수 주무관이 올린 ‘군산 푸드’ 영상은 공개된 지 2주도 안 돼 260만회의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영상은 물론 각 지자체와 공공 기관들이 단 댓글로도 화제를 모았다. “이러면 다른 홍보하시는 분들이 힘들어져요”(농림축산식품부) “오늘도 자극만 받고 갑니다”(광진구청) “아 뺏겼다ㅜㅠ”(울산 남구) “충주시 홍보맨 이후 지자체, 공공기관 홍보팀 최대 위기”(한국수목정원관리원)….

농담으로만 흘려듣기엔 아픈 대목이다. 충주맨 이후 대부분의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뉴미디어 홍보에 열을 올리면서 지나친 경쟁에 대한 피로감이나 원치 않는 차출 등에 대한 불만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2030이 많이 사용하는 한 소셜 미디어에선 한 이용자가 “충주맨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면서도 “충주맨이 히트 치고 난 후 많은 공공기관이 유연한 SNS 운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직원 차출해서 쇼츠, 영상 찍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글을 올렸다. 자신을 공직자라고 주장한 그는 “끼 없는 일반 행정, 기술 직원들이 ‘이건 첫 번째 레슨(최근 유행하는 밈 중 하나)’ 하면서 고통받는 게 싫다”며 “위에서 등 떠밀어서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도 했다. 해당 글엔 “조만간 차출당할 예정이라 잠도 안 오고 미치겠다” “박봉에 독창성까지 쥐어짜야 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답글이 달리기도 했다.

새싹을 억지로 자라게 할 순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