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다. ‘파멸’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소행성 충돌로 지구가 완전히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를 파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파멸당할 수는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패배’다. 인간은 패배하지 않아야 한다. 패배의 한자는 ‘敗北’다. 여기서 ‘敗’는 그야말로 ‘지는 것’이다. 지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다. 문제는 ‘北’에 있다. ‘北’는 ‘달아나다’라는 뜻이 있다. 문제는 지는 게 아니라 달아나는 것이다. 달아난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한두 번 경기에서 졌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은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돌아오다 상어 떼의 공격을 받는다. 노인은 살점은 다 뜯겨 나가고 머리와 뼈만 남은 청새치를 가지고 항구로 들어온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산티아고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정작 그는 사자 꿈을 꾸며 단잠을 잔다. 산티아고가 ‘사자 꿈’을 꾸는 것은 다음 날이 되면 아무렇지 않게 또 청새치를 잡으러 출항한다는 뜻이다.
그에게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결과물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산티아고는 허무해서 다음 날 다시 바다로 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바다로 거뜬히 나갈 수 있는 마음은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성장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성장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이다.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멈춘다는 뜻이다. 멈추면 썩는다. 우리는 시간을 때우듯이, 버티듯이 살면 안 된다.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
세르반테스의 작품 ‘돈키호테’를 보면 돈키호테 나이를 ‘쉰에 가깝고’라고 설정해 놨다. 돈키호테는 17세기 초 작품이다. 세르반테스가 산 시기 스페인의 평균 수명은 40세 정도다. 그렇다면 지금으로 환산해 돈키호테의 나이를 99세 정도로 설정한 것이다. 즉 죽음을 앞둔 노인이다.
그런 돈키호테는 기사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 자기가 기사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허접한 갑옷과 늙은 말 로시난테, 산초를 데리고 모험을 떠난다. 17세기 스페인의 산속은 늑대와 곰, 그리고 산적 때문에 잘못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모험을 떠난다. 기꺼이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다.
난 돈키호테를 읽으며 세르반테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돈키호테가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결과를 이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으니까. 돈키호테는 그저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세르반테스가 설정해 놓은 것이다.
돈키호테는 귀족이다. 집에 가만히 누워 병간호를 받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녹슨 상태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안락한 집을 버리고 이름 모를 산속에서, 바위 위에서, 나무 옆에서 생을 마감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난 이런 돈키호테의 마음이 너무 이해된다. 스위스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 ‘걷는 사람’을 보라. 난 이 작품이 돈키호테를 그대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하지만 부릅뜬 두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작품이 바로 ‘걷는 사람’이다. 난 죽는 순간에도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이룩한 사업체, 내가 벌어놓은 돈, 내가 쓴 책을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정면을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20년 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서른네 살 되던 2005년. 고속도로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실려간 병원에서 의식이 돌아오니 의사는 “유언부터 하고 정리할 거 정리하라”고 했다. 뇌출혈에 눈 한쪽이 마비되고 폐에도 절반쯤 피가 차 있었다. 진짜 치명적인 건 심장에 있는 주먹만 한 핏덩어리였다. 죽음 문턱에 갔을 때, 내가 사놓은 집, 연예 대상에서 받은 상, 개그맨으로 알렸던 내 이름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오로지 안에서 뭔가 꿈틀대는 게 있는데, 내가 죽으면 그것을 세상에 꺼내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고 원통했다. 즉, 인간은 죽는 순간에도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꺼내고 싶어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씩 세상을 향해 내딛다 보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교통사고 이후 좌우명을 ‘녹슬어 사라지지 않고 닳아서 사라지겠다’로 정했다. 닳아서 없어진다는 말은 마지막 순간까지 성장하겠다는 뜻이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멈춰 있다면 녹슨 인생 아닐까. 죽을 때 반드시 후회하는 그런 인생 말이다.
지는 것과 패배는 다르다
서울 목동에서 갈비집을 할 때 자주 오던 손님들이 있었다. ‘골때리는 그녀들’이라는 축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팀이었다. 하루는 이 팀원들이 와서 고기를 굽지도 않고 시무룩하게 앉아만 있는 것이다. 조용히 가서 고기를 구워 주며 곁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니, 신생 팀에 아슬아슬하게 0대1로 지고 온 것이다. 몇몇 멤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억울해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감독인 정대세 선수가 와서 자리에 앉았다. 침울한 분위기를 본 정대세 선수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평생 축구를 해왔습니다. 제가 아는 한 축구에는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기거나….”
정대세 선수가 여기까지 말하자, 모든 멤버가 입을 모아 “지거나”라고 대답했다. 잠시 멤버들을 쳐다보던 정대세 선수는 “배우거나”라고 크게 외쳤다.
순간 아무 생각 없이 고기를 굽던 내 팔에 닭살이 돋았다. ‘그래!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기거나 배우거나’만 있는 거다. 인생에 패배는 없다. 죽음도 패배가 아니다. 삶은 과정이고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축구 경기에서 한번 졌지만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이번에 배웠으니 다음 경기는 반드시 달라질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산티아고도, 돈키호테도 등을 돌려 달아나지 않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앞으로 수없이 질 것이다. 하지만 졌다고 원통해하거나 우울해하지 말자. 기꺼이 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자. 뭔가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면 다시 한번 도전하자. 달아나지만 않으면 된다. 이를 악물고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말고 오로지 목표만 바라보며 한 발자국 내디디면 된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지고 배우고 성장하며 또 나아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해 있는 거인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계속 배우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고 나아가라
“자신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승리다.”
돈키호테의 말이다. 인간의 재능 중에 가장 유용한 재능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힘’이라고 한다. 음악 하는 능력, 그림 그리는 능력, 수영하는 능력, 노래하는 능력, 춤추는 능력…. 이런 능력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믿어야 한다. 얼마 전, 같은 소속사의 진선규 배우가 캐나다에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고 왔다. 진 배우는 37km 지점에서 갑자기 오열이 터졌다고 한다. 이유를 물었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다고 몰아붙이기만 했지, 자신을 칭찬해 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런 마음이 솟아나면서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엉엉 울면서 달렸어요. 앞으로는 나 자신을 많이 칭찬해 주려고요.”
나 자신을 칭찬해 주자. 나를 믿는 첫걸음이 나를 칭찬하는 것이다. 실패해도 자책하지 말고 수고했다고 칭찬해 주자. 다음번엔 성공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자. 나의 가장 큰 응원군은 바로 나다. 나를 이기려면 몰아붙이지 말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힘을 실어 주면 된다.
요즘 경기도 좋지 않고 모든 게 힘들다. 이럴 때 멈춰 서서 경기가 좋아지길 기다리면 안 된다. 문제 해결 방법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고 의지하지 말고 나와 손잡고 나를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캄캄한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상어 떼와 싸우며 외치는 산티아고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사자후를 들어보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이를 악물고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기다리며 녹슬어 가는 삶보다 나아가며 닳는 삶을 선택하자.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이 와도 배움으로 승화시키고 성장하는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어보자. 지금 당장 자신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자.
돈키호테는
스페인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 1605년 1편, 1615년 2편이 출간됐다. 우리가 잘 아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주로 1편에 담겨 있다. 2편에는 돈키호테와 산초가 벌이는 갖가지 모험과 함께, 돈키호테가 고향 마을로 돌아와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다. 이후 영화·만화·연극·뮤지컬 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재창조됐다.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 발표한 소설. 그가 쿠바에 머물던 시절 알게 된 어부의 경험을 토대로 썼다고 한다. 그는 이 소설로 1953년 퓰리처상을 탔다.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헤밍웨이에게 노벨상을 주며 “(‘노인과 바다’는)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다룬 작품”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