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노트

무대를 밝히던 희미한 조명이 꺼집니다.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과 함께 객석의 웅성거림도 잦아들죠. 옆자리에 앉아 장난을 치며 떠들고 웃던 아이들도 어느새 자리를 고쳐 앉아요. 짧은 고요가 흐르고 이어지는 미세한 긴장감. 현실의 시간에서 무대의 시간으로 데려가는 마법의 장치, 암전.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배우의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나네요. 자, 이제 시작합니다, 오늘 밤의 연극을.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수많은 극장의 무대에서 배우는 울고 웃고, 관객은 박수를 보냅니다. ‘연극의 3요소’를 기억하시나요? 바로 희곡, 배우, 관객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춰야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죠.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연극에서 관객의 역할은 특별합니다.

연극을 의미하는 영 단어 ‘시어터(theater·theatre)’가 관객석을 뜻하는 ‘테아트론(theatron)’에서 탄생했으니 연극의 어원이 탄생한 기원전 그리스부터 연극이 있는 곳에는 늘 관객이 함께 있었지요. 오래전부터 관객은 그저 객석에 앉아 보고 듣는 수동적인 타자가 아니라 배우와 교감하고 연극을 완성하는 일부였습니다. 연극과 친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물론 ‘관객’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연극 한 편 고르는 일이 쉽지가 않아요.

얼마 전, 특별한 관객과 함께 연극을 보게 되었어요. 충청남도 부여 옥산면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서울 예술의전당에 도착한 중고등학생 청소년 8명. 공연장 로비에서 만난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여정에 지친 기색이나 한낮 폭염의 맹공에도 끄떡없는 얼굴로 밝게 웃으며 저를 맞아주었지요.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 활동의 기회를 나누어주는 ‘CJ 나눔재단’의 ‘CJ도너스캠프 객석나눔’ 후원으로 연극 관람 나들이에 나선 아이들은 한껏 들뜬 표정이었어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전교생 22명이 전부인 학교를 다니는 옥산면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빈집으로 가는 대신 지역아동센터로 가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센터 선생님과 숙제도 한다고 해요. 돌봄의 공백을 대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과 공공의 영역에서 보완하고 있는 것이죠. 함께 본 연극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였어요.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다면…. 이런 가정으로 흥미로운 상상이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세 시간이나 되는 긴 연극을 잘 볼 수 있을까 걱정했지요. 하지만 객석 의자에 등 한번 붙이지 못하고 무대에 빠져들듯 몰입하는 아이들은 그날 가장 적극적인 관객이 되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의 입술에 묻은 약물로 죽음을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도 훔치던데요.

연극이 끝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연극은 어땠어?”라고 물어보자 누구 하나 선뜻 대답을 못 해요. 그래서 질문을 바꿔보았어요. 체격 큰 남학생에게 공연 중에 왜 눈물이 났는지 이유를 물어봤죠.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셰익스피어와 비올라도 결국 헤어지잖아요”라고 하기에 “로맨티스트네. 나중에 더 멋진 사랑을 하겠구나”라고 말했더니 모두가 꺄악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립니다. 오래전, 수능을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는 봄을 기다리던 길고 지루한 겨울방학의 어느 날이 떠올랐어요. 연극 티켓 예매했다며 대학로의 한 극장으로 데리고 나서던 사촌 오빠가 공연이 끝나고 나오며 어땠냐고 묻더라고요. 전 잠깐 생각하다가 “음… 좋았어”라는 한마디를 한 것 같아요. “애써 표 구했더니 반응이 겨우 그거냐”라는 오빠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그때는 더 이상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정말 좋았으니까요. 연극을 함께 본 아이들도 모두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날 이후 연극은 늘 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공연장이 직장이 되었죠. 사실 연극보다 재미있는 게 많은 요즘입니다. 뉴스를 보면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가족의 패륜, 살인, 치정이 현실로 펼쳐지고, 24시간 TV 채널과 OTT, 숏폼들은 우리의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해요. 기원전 그리스나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처럼 연극이 유일한 오락이었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이 났습니다. 기술의 발달은 연극의 종말을 점치곤 하고, 또 한편에서는 인류가 발명한 이 오래된 예술이야말로 지구 종말의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을 보루라고 선언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질문하지요. “연극을 본다고 뭐 인생이 달라지나요?”

연극이 인생을 바꾸지는 않지요.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연극이 내 인생의 여정에 등불을 밝히는 길잡이가 되었다는 것을요. 방향 없는 인생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방랑길에 동행하며 생의 의지를 다졌고, 고약한 마법사 프로스페로가 일으킨 폭풍우에 떠밀리더라도 어느 무인도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해가 질 무렵 다시 부여로 떠나는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생각했어요. ‘너희들 앞에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그래도 살다가 힘이 드는 어느 날, 셰익스피어 이야기에 흠뻑 빠진 관객이었던 오늘을 행복하게 떠올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