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는 혼자 태어나지 않습니다. 고흐·달리·모네·피카소…. 흔히 ‘천재’로 소개되는, 서양 미술사를 수놓은 불멸의 거장들에게는 모두 평생의 멘토가 있었습니다. 스승, 경쟁자, 후원자 등 여러 형태의 ‘정신적 버팀목’ 덕분에 불세출의 걸작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30여 년간 미술계에서 활발한 전시 기획·저술 활동을 펼쳐온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이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영감을 주고 새로운 방향을 열어준 작가와 멘토, 그 아름다운 관계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누구나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창작혼에 감탄한다. 27세에 화가가 돼 37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0년 동안 약 900점의 회화와 1100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극도의 정신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생사, 정식 교육을 받지 않고 전통 미술을 뛰어넘은 혁신적 표현 방식. ‘반 고흐 신화’는 그를 독학으로 걸작을 남긴 고독한 천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미술학교도 안 다닌 늦깎이 화가는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을까?

고흐의 곁에는 보이지 않는 인생의 길잡이가 있었다.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밀레는 아버지이며 젊은 화가들에게 모든 면에서 멘토이자 스승”이라고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힘든 시기마다 마음속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 가르침에 의지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흐가 화가의 길에 들어선 1880년, 밀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멘토, 멘티의 첫 만남

들판에서 하루 일과의 끝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농부 부부. 밀레의 ‘만종’을 본 고흐는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숭고함의 가치를 깨닫고 밀레를 정신적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오르세미술관

1874년, 구필 화랑 런던 지점 사원으로 일하던 21세의 고흐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을 한 점의 그림과 마주하게 된다. 밀레의 ‘만종(晩鐘)’ 복제화였다. 해 질 녘 하루의 고된 작업을 마친 농부 부부가 저녁 종소리에 맞춰 기도하는 장면. 남자는 삽을 내려놓고 흙투성이 손으로 벗은 모자를 쥔 채 머리를 숙였고, 여인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다. 고흐는 노동의 신성함, 자연의 질서, 신에 대한 경외심, 하루를 마감하는 감사의 기도가 화폭에 고요히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 강렬한 첫인상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밀레가 그린 ‘만종’은 정말 풍요로워, 한 편의 시 같은 그림이야.”

땀과 신앙이 하나로 어우러진 장면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 것이다. 밀레는 당시 미술계의 관습을 깨고 땅을 일구는 평범한 농부 부부를 화폭 한가운데 존엄한 존재로 그려냈다.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런 따뜻한 시선으로 농민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종’이 전하는 믿음과 사랑, 겸손의 가치는 고흐가 평소 추구해온 인생관과도 맞닿아 있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깊은 연민을 품고 살았다. 그에게 ‘만종’은 평범한 농촌 풍경화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담고 있는 종교화처럼 느껴졌다. 이 첫 만남은 고흐가 밀레를 영적 스승으로 섬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림 앞에서 신발을 벗다

고흐 자화상(1887)과 밀레 자화상(1840~1841). /반고흐미술관·보스턴미술관

1875년 6월 29일, 파리의 한 전시회장. 고흐는 밀레의 유작 전시회에서 복제화가 아닌 원작을 비로소 마주하고 벅찬 감격에 휩싸였다. 고흐에게 이곳은 그림을 사고파는 경매장이 아니었다. 기독교적 사랑과 겸손의 가치를 체험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흥분된 감정을 전했다. “밀레의 그림들이 전시된 호텔 드루오의 방에 들어갔을 때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라는 계시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이 구절은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던 장면을 인용한 것이다. 이날의 경험은 훗날 그가 그림을 통해 영혼을 치유하고자 했던 열망의 씨앗이 됐다.

1882년 3월, 고흐는 밀레의 후원자이자 수집가였던 알프레드 상시에(1815~1877)가 출간한 밀레 전기를 밤새워 읽고 있었다. 상시에의 전기는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밀레 ‘위인전’에 가까웠다. 밀레는 생전에 어느 정도 성공을 이뤘지만 책에서는 안락한 도시 생활을 등지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성자처럼 그려졌다. 상시에는 “밀레는 소박한 농민들 속에 들어가 살면서, 잿빛 스웨터를 입고 빈민의 상징인 나막신까지 신었을 정도로 스스로 농민의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고 썼다. 고흐가 갈망하던 영적 아버지이자 예언자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밤중에도 잠에서 깨 램프를 켜 놓고 계속 읽을 정도로” 책에 빠져들었다.

화랑 사원, 교사, 서점 직원, 선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어디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던 고흐는 그 책 속에서 인생의 좌우명이 될 문장을 찾아냈다. “예술은 전투다. 예술에 자기 목숨을 내놔야 한다… 나는 계속해서 고통을 느끼고 싶다. 고통은 화가가 자신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하도록 해 준다.” 밀레의 이 선언을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그대로 옮겨 적으며, 예술가로서 겪는 모든 고통을 성스러운 전투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고백한다.

◇모방에서 창조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1850∙왼쪽)과 이에 영감을 받아 고흐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1888). /보스턴미술관·크롤러뮐러미술관

1888년 6월 남프랑스 아를. 고흐는 뜨거운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황금빛 밀밭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는 파리 시절을 거치며 유럽 인상주의와 일본 우키요에 판화에서 빛과 색채의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여 독자적 화풍을 확립한 상태였다. 이제 그는 존경하는 밀레의 작품에 담긴 농민과 노동의 주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할 준비가 돼 있었다. 특히 밀레가 1850년 완성한 대표작 ‘씨 뿌리는 사람’은 그의 평생 과제였다. 고흐는 이 주제를 30번 넘게 반복해 그렸고, 그중 하나가 아를에서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이다. 두 작품은 3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노동의 숭고함과 생명의 순환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다만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밀레의 그림은 갈색, 회색, 어두운 파란색을 바탕으로 프랑스 농민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농부는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선 현실의 인간이다. 반면 고흐의 그림은 노란색 태양과 보라색 밭의 강렬한 보색 대비를 통해 영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여기서 농부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림의 중심은 신성한 후광처럼 빛나는 태양이며 이것은 생명과 창조의 근원을 상징한다. 한때 목회자를 꿈꾼 고흐에게 씨 뿌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교적 의식이었다. 같은 제목의 그림이지만, 하나는 땅의 기록, 다른 하나는 영혼의 찬가인 셈이다.

◇영혼의 스승이 준 선물

건초 더미에 기대 낮잠 자는 농부 부부를 그린 밀레의 드로잉(1860∙왼쪽)을 고흐는 색의 언어로 번역해 ‘낮잠’(1890)으로 탄생시켰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오르셰미술관

1889년 겨울, 생레미(Saint Remy)의 정신병원. 고흐는 정신 쇠약의 고통 속에서도 약 3개월간 21점에 달하는 ‘밀레 따라 그리기’ 연작을 그렸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던 고흐가 불멸의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모사(模寫)가 있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밀레의 흑백 판화를 주제 삼아 즉흥적으로 색채를 입혔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마치 연주자가 베토벤의 악보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주하듯 내가 하는 건 모사가 아니라 흑백으로 된 인상을 색채라는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색채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의미는 같은 주제의 또 다른 두 그림에서도 발견된다. 건초 더미에 기대 낮잠을 자는 농민 부부의 일상. 동일한 장면임에도 고흐의 그림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사실주의 거장 밀레의 주제와 구도를 가져와 후기 인상주의 색채와 표현 기법의 옷을 입혔다. 노란 건초 더미, 파란 하늘, 두 인물의 옷에 스며든 푸른 색조, 꿈틀거리는 듯한 굵고 거친 붓질의 흔적이 화면에 생생히 살아있다. 밀레의 작품을 색으로 옮기는 작업이 극심한 발작과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고흐를 치유해줬다. “나는 그 일(모사)을 우연히 시작했지만 그것이 가르침과 위안을 준다는 걸 알게 됐다.”

‘색채의 언어’로 번역한 선대의 사조. 후배가 선배의 업적을 자기 언어로 확장해낸 과정은 시간을 초월한 대화이자, 죽음을 넘어선 교감이며, 고독 속에서 이뤄진 가장 친밀한 멘토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