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예술가가 항상 고매한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결함과 모순으로 가득한 삶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예술가도 있다.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시는 경이로워도 정치적 행적은 경악스럽다. 하지만 세계 예술사를 통틀어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메리시·1571~1610) 같은 사례는 드물다. 카라바조는 ‘당대 최고 화가’였건만 폭력 행위로 일곱 번 감옥에 갔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귀족들의 비호로 처벌을 면하곤 했으나 궐석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로마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카라바조가 시칠리아를 거쳐 몰타로 피신한 건 1607년 여름이었다. 몰타 통치자 성 요한 기사단장에게 기사 작위를 받아 교황청 사면을 받기 위해서였다. 필사적 구명 노력은 몰타 성 요한 성당에 있는 ‘성 요한의 참수’라는 걸작으로 남았다.
‘서양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성 요한의 참수’ 앞에 난 못 박혀 서 있었다. 코비드 사태 발발 직전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이 그림은 가로세로 5m×3m가 넘는 카라바조의 최대 크기 작품이자 자필로 서명한 유일한 그림이다. 그가 자란 동네 이름인 카라바조가 아니라 본명인 미켈란젤로로 서명한 데 난 주목했다.
참수된 성 요한 목에서 쏟아진 피로 서명한 모양새인 이 작품엔 삶에의 열망과 죽음의 공포가 교차한다. 비극적 운명을 예견한 카라바조가 자신이 흘릴 피를 은유한 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카라바조의 성향은 이즈음 급속히 나빠진다.
현대 예술사에서도 악명 높은 범죄자가 예술적 재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무장 강도와 인질극으로 종신수가 된 영국의 찰스 살바도르(1952~)가 흥미롭다. 독특한 시와 미술 작품을 선보였으나 카라바조의 압도적 천재성에 비하면 살바도르는 그저 밋밋할 뿐. 카라바조가 태어난 해 사망한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1500~1571)도 살인죄를 저지르면서 좌충우돌했고 멋진 작품과 자서전을 남겼지만 카라바조 앞에선 빛이 바랜다.
스케치도 없이 빠르게 본그림을 완성하는 카라바조의 ‘악마적 재능’은 당대를 심원하게 초월한다. 어둠을 배경으로 한 극단적 명암 대조법(테네브리즘)이 비추는 인물들은 저잣거리 장삼이사들이다. 깡패, 도둑, 창녀, 불량배들이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주인공일 때도 신성함을 거세해 강력한 현대적 울림을 준다.
카라바조 그림은 극적인 명암 대조로 녹여낸 강렬한 의미가 관객을 강타한다. 현대 미술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가 카라바조를 ‘할리우드 조명을 구사한 최초의 화가’라고 부를 정도다. 문자 그대로 어둠(tenebra)의 화가였던 카라바조는 자신의 인생을 압도한 암흑에서 탈출하려고 그렇게 애타게 구원의 빛을 찾아 헤맨 것일까?
카라바조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 생생한 증거다. ‘이중(二重) 초상’으로 유명한 이 그림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얼굴 모두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다. 다윗(젊은 카라바조)이 골리앗(늙은 카라바조)의 잘린 목을 들고 처연하게 내려다본다. 부서져 버린 삶에 대한 회한이자 그림으로 쓴 처절한 유언장! 열광적 팬덤을 몰고 온 카라바조 한국 전시회에서도 큰 인기를 끈 작품이다.
카라바조는 기사가 되자마자 다른 기사단원에게 중상을 입혀 도주하다가 나폴리 인근에서 객사하고 만다. 39살 천재의 황망한 죽음이었다. 평생 찾아 헤맨 마음의 평화는 끝까지 그를 외면했다. 악명 높은 폭력배이자 살인자였던 청년 화가가 두고두고 후세의 사랑을 받는 건 인생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술가의 삶과 그의 예술 세계는 정녕 무관한가? 빼어난 예술은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