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대 청년 작가 미술 축제 ‘2025 아시아프(ASYAAF·Asian Students and Young Artists Art Festival, ~9월 7일, 이하 아시아프)’를 시작으로 ‘2025 대한민국 미술축제’(이하 대한민국 미술축제)의 막이 올랐다. 이후 10여 개의 비엔날레와 아트페어가 릴레이 경주하듯 이어진다. 올해 18회째를 맞이하는 아시아프는 첫 회 개최 장소였던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열린다. 광복 80주년·서울역 개장 100주년이기도 한 해, 아시아프를 계기로 미술축제의 주무대 중 하나로 변신한 근현대 건축 공간으로 건축&아트 투어에 나섰다.
◇‘대한민국 미술축제′ 첫 주자 ‘아시아프’
1925년에 개장한 옛 서울역사(驛舍)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 양식의 철도 건축물. 개장 당시 경성 최고의 핫플레이스였다. 일제강점기 소설 이광수의 ‘흙’, 이상의 ‘날개’,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 등에선 그저 고독의 공간으로만 그려졌는데, 복원을 거쳐 역의 기능 대신 ‘옛’ 서울역사로 자리하는 지금은 수준 높은 전시와 행사를 아우르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시아프가 열리는 문화역서울284에 들어서면 역사의 중앙홀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거대한 설치 작품이다. 카운터 형태 테이블엔 ‘웰컴 투 아트 스테이션(Welcome to Art Station)’이라는 이번 아시아프 슬로건이, 위쪽 전광판엔 열차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행선지 대신 아시아프 참여 작가 이름과 작품명이 실시간 교체·소개된다. 그 뒤론 마네킹 8개가 역사를 내려다보듯 서 있다. ‘아트 스테이션’ 콘셉트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놓은 이 작품은 201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을 장식했던 설치미술가이자 이번 아시아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한 이완의 ‘표준시’다. 카운터 자리에선 승무원 대신 승무원 복장을 한 ‘AI 도슨트’가 모니터에 등장해 작품에 대해 설명한다. 딱딱한 말투에 어색한 입 모양이지만, 똑소리 나게 전시에 대해 들려준다. 영어 해설도 가능하다. ‘표준시’는 올해 개장 100주년을 맞은 옛 서울역사에 대한 의미와 상징을 담아 옛 역사 풍경과 추억을 소환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전광판을 통해 인포데스크 역할을 하는 곳이자 이번 아시아프의 대표 포토존이라니 기념 사진 하나쯤 남기고 관람을 시작할 만하다.
◇옛 驛舍 구석구석 돌며 ‘기대작’ 발굴
18회째를 맞이한 올해는 아시아 전역 청년 작가 550여 명이 회화·입체·미디어·공예·디자인 등 12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크게 19~35세 작가의 실험적인 작품을 소개하는 ‘영 아티스트’ 부문, 36세 이상 작가의 성숙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히든 아티스트’ 부문 그리고 해외 작가들이 참여하는 ‘해외 아티스트’ 부문으로 구성된다. 특히 올해 처음 전시 기획에 AI를 활용해 1200여 점의 출품작들을 키워드와 의미별로 분석, 분류했다. ‘출발과 도착’ ‘장소와 비장소’ ‘이주와 정주’ ‘개인과 군중’ ‘기억과 망각’ ‘질서와 혼돈’ ‘목적과 경유’ ‘과거와 미래’ 등 8량의 ‘아시아프 열차’라는 설정 아래 전시를 펼친다. 미래를 향한 젊은 예술가들의 여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전시 공간을 꾸몄다.
12개의 웅장한 화강암 기둥, 온종일 해가 들고 나가는 양쪽 반원형의 창, 스테인드글라스가 어우러져 석조 건축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중앙홀의 테마는 ‘질서와 혼돈’이다. ‘표준시’를 중심으로 양쪽 기둥 주변부터 작품을 배치해 자연스럽게 관람 동선과 연결된다. 양유진 작가의 ‘약과 스툴’은 중앙홀에서도 중앙인 ‘명당’에 자리 잡아 오가다 보면 눈에 걸리기 쉽다. 전통 한과인 약과 모양을 원목 의자로 표현한 작품은 먹음직스러울 만큼 사실적이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묘한 색의 층위를 자랑하는 아크릴 테이블과 의자, 폴리염화비닐을 주재료로 활용해 프라이드치킨 질감으로 반려견을 표현한 작품 등 기발하고도 톡톡 튀며 아리송하기도 한 청년 작가들의 작품이 기둥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이어진다. ‘표준시’ 뒤 플랫폼 쪽의 개방형 복도는 히든 아티스트 작품들이 장식했다. 공예 작품 전시대엔 판매 완료를 알리는 빨간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었다. 현장에서 작품 안내를 돕던 대학생 자원봉사 SAM(Student Art Manager)은 “중년 관람객들 사이에서 예술 감성을 살린 실용적인 작품들이 인기”라며 “다기와 컵 등이 가장 빠르게 판매된다”고 했다.
아시아프 열차의 종착역이자 마지막 섹션이라 할 수 있는 ‘과거와 미래’는 2층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당이었던 ‘그릴’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그 옆 ‘소식당’이 있던 자리는 그 옛날, 반원형 창을 통해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식사를 했다던 곳. 반대편 창을 통해선 역사 중앙홀이 내려다보이는데, ‘표준시’의 작품 구성 요소인 마네킹 시점에서 역사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관람객들은 8개의 섹션을 탐험하듯 전시를 즐기며 마음에 들거나 기대가 되는 작가의 작품을 현장에 있는 SAM을 통해 구매할 수 있다.
◇올해도 ‘10만원 소품’ 완판 행렬
조선일보사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작가미술장터가 후원하는 아시아프는 중간 수수료 없이 작품 판매 수익 전액이 작가에게 돌아가는 공익성 아트페어다. 1·2부로 나뉘어 진행되는 아시아프의 1부 전시는 24일까지다. 휴관일인 25일에 전시 작품 교체 후 2부(~9월 7일) 전시가 시작된다. 이번 전시는 서울역이라는 접근성이 더해져 1부 전시의 경우 관람객이 작년 대비 64%(8월 19일 기준) 정도 늘었단다. 편안한 복장으로 여행 가방이나 유모차를 끌고 나선 가족 단위 관람객 등 관람객층도 한층 다양해진 분위기다. 1부 전시 막바지를 향해가는 지금, 판매 완료된 작품도 점차 늘어나는 중. 현장 관계자에 따르면 “참여 작가들이 ‘가성비 구매’를 원하는 관람객들을 위해 준비한 ’10만원 소품’은 ‘오픈 런’ 하게 만든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인기”라며 “전시 첫 주에 90% 이상 팔려 2주 차부터 새로운 10만원 소품을 추가로 전시해 판매하는 중”이라고 했다. 9월 6일 오후 4~7시엔 디제잉 이벤트가 기다린다. 시간을 품은 근대 건축과 청년 작가들의 작품에 BGM(배경 음악)이 더해진다. 아시아프 입장료는 1부 성인 1만원, 어린이·청소년 6000원(할인은 별도 문의·02-724-6317)이며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화~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입장 마감 오후 6시) 관람 가능하다.
◇‘성지역사박물관’ 지나 ‘시립미술관’까지
26일부터 11월 23일까지는 문화역서울284와 가까이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하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해 낙원상가(낙원악기상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청년예술청 등에서 대한민국 미술축제 주요 행사 중 하나인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열린다. 아시아프 개최 기간인 9월 7일까지, 두 미술 축제가 교집합을 이루는 기간엔 두 곳을 오가며 축제를 즐길 수 있다. 서울역에서 서울시립미술관까지는 도보 20~30분 거리로 날씨만 따라준다면 천천히 걸어가 볼 만하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도처에 맛집 등 즐길 거리가 유혹하지만, 서소문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녹음으로 둘러싸인 특별한 공원이 기다리니 서둘러 갈 수밖에. 빌딩 숲 사이에 폭 안기듯 자리한 공원은 2019년에 개관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역사 공원’이다. 박물관은 개관과 동시에 서울시 최우수 건축상을 받아 성지순례객들은 물론이고 건축학도, 사진 동호인들이 일부러 찾는 서울역 인근 숨은 명소다.
박물관이 들어선 자리의 사연도 특별하다. 박해의 현장인 천주교 순교지였다가 1973년 근린공원으로 조성됐으나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에 둘러싸이고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이 들어서며 한동안 노숙자들의 천국이라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특이하게 지상층에 있는 역사 공원에서 시작해 지하층으로 내려가면서 박물관과 기념경당, 콘솔레이션홀, 하늘광장 등이 연결되는 코스다. ‘하늘길’에서 성스럽고 신비로운 미디어아트를 감상하고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전시와 예술 작품, 공간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성지에 스며들어 시간을 까맣게 잊기 쉽다. 다시 박물관에서 나와 서울시립미술관까지는 도보 10여 분 정도 걸린다. 횡단보도에 서면 59년 동안 쓰임을 다해 철거 예정인 ‘서소문 고가’ 아래로 경의중앙선이 시간 맞춰 지난다. 차단기가 내려와 전철이 지나갈 때면 아날로그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경찰청 앞 횡단보도를 건너 시청역 방향으로 걷다가 식당과 카페가 밀집된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면 ‘정동길’ 지름길이다. 이후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을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에 닿는 코스는 익숙한 듯 새롭다.
◇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어달리기
서울시립미술관도 르네상스 양식의 근대 건축 중 하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법원)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에 1928년 일제가 경성재판소로 지은 법원 건물로, 광복 후 대법원 청사로 사용됐다가 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용도 변경됐다. 옛 대법원 건물의 전면부는 그대로 보존하고 후면부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한 형태다. 전면부 파사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미술관 입구 아래쪽엔 당시 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의 글씨로 알려진 정초석이 선명하다. 원형이 남은 현관부만 ‘서울 구 대법원 청사’로 국가유산에 등록돼 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앞서 미술관 로비에선 브라질 출신의 유명 조각가 에르네스토 네토의 대형 설치 작품 ‘영원히 교차하는 춤’(~2026년 12월)이 기다린다. 2020년 시작된 ‘SeMA 공용 공간 프로젝트’의 네 번째 시리즈로 높은 층고의 천장과 격자창으로 자연광이 투과되는 매개 공간까지 이어지는 대형 작품은 한눈에 담기 쉽지 않을 정도다. 이와 함께 9월부터는 프로그램의 하나로 서울시립미술관의 옥상 ‘세마휴’에서 영화 프로그램 ‘프리즈 필름 서울 2025’를 개최해 즐길 거리가 추가된다. 연계 프로그램으로 종로 낙원상가 3층에선 사운드룸 전시, 청년예술청에선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건축 거장 김수근이 설계한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도 26일부터 9월 7일까지 ‘아르코데이’가 기다린다고 하니 두 다리 튼튼할 때, 근현대 건축과 미술 축제 도장 깨기에 도전해 볼 일이다. 지금부터 미술 축제 여행도 ‘제철’이니까!
[개항장 건물에선 음악회, 시간 멈춘 마을에선 전시회…]
그 밖의 근현대 건축&아트 만나는 공간들
근현대의 시간을 오롯이 관통하며 자리를 지켜오다 예술 공간으로 변신한 건물들도 그냥 지나치기 아쉽다. 제물포역·신포역과 가까운 인천 개항장 거리 초입의 ‘인천아트플랫폼’은 일본 3대 해운 회사 ‘구 일본우선주식회사’를 비롯한 근대 개항기 건물과 1930~1940년대에 지은 건물을 새로 단장해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며 전시장·공연장·인천생활문화센터·창작스튜디오 등 다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요기조기 음악회’ ‘인천 개항장 야행’ 등 개항장의 주요 행사 및 공연 개최 장소로도 유명하다. 30일엔 인천아트플랫폼 야외 광장에서 시민 대상 열린 음악회인 ‘요기조기 음악회’ 가을 공연에 앞서 특별 행사인 ‘2025 요기조기 데이’를 진행한다. 포크 듀오, 록 밴드 등 공연 팀이 나서 대중가요·밴드·국악·클래식·아카펠라 등 여러 장르 음악 무대를 꾸밀 예정이다.
청주 연초 제조창은 문화의 향기를 퍼뜨리는 ‘문화제조창’으로 탈바꿈해 전국구 명소로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 미술축제’ 주요 행사 중 하나인 ‘청주공예비엔날레’ 개최지로 더욱 알려진 곳. 오는 9월 4일부터 11월 2일까지 다시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주무대로 ‘등판’한다. 문화제조창은 1946년부터 2004년까지 연초제조창이었던 ‘청주연초제조창’을 문화의 향기를 퍼뜨리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며 전국구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문화제조창을 중심으로 본전시에서는 16국 작가 140명의 작품 300여 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밀랍 조각가 모나 오렌의 ‘연잎 시리즈’ ‘현대 트랜스로컬 시리즈’ 등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기다린다. 역대 최대 규모, 역대 최장인 60일간 열린다는 ‘역대 최상급 공예 비엔날레’를 놓칠 수는 없겠다.충남 서천의 판교 시간마을(현암마을)도 판교 시간마을 기획 전시 및 공모 선정 작가전인 ‘유토피아적 플랫폼의 경계’(~2026년 2월 28일)를 열며 ‘예술 옷’을 입었다. 9월 14일까지는 1기 전시로 등록문화유산인 근대 극장 ‘판교극장’을 비롯해 근현대 흔적을 간직한 ‘장미사진관’ ‘오방앗간’ ‘촌닭집’ 등을 노동식, 쑨 지 등 작가 5명이 작품 전시장으로 꾸몄다. 시대극 세트장처럼 시간이 멈춘 듯한 조용한 마을을 탐험하며 전시를 관람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전역 가까이에 있는 대전 ‘헤레디움’도 가볼 만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에서 굵직한 전시를 선보이는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현재는 전시 교체 중이며 31일부터 2026년 2월 22일까지 프랑스 현대미술가 로랑 그라소 개인전을 연다.
한때 제국을 꿈꾸던 이들이 전국 곳곳 남긴 흔적에 젊은 작가들이 예술 꽃을 피우는 지금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8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