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남극이란 공간에 너무 압도적인 매력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강한 끌림을 느꼈다. 남극은 어떤 국가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주인 없는 대륙이다. 남극의 내륙엔 1년 내내 생존할 수 있는 어떠한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펭귄도 먹을거리가 있는 해안가에만 산다. 남극의 여름은 24시간 내내 백야이기 때문에 어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매력 때문에 아무도 없이 혼자 떠나는 낭만적인 결정을 한 건 아니다. 혼자 떠나거나 남극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혼자 해냈고, 동기부여가 되는 좋은 롤모델이 있었다.
1911년 아문센의 원정대가 처음으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내가 처음 남극 탐험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2008년으로부터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여성이 처음 남극점에 도달한 시기가 1994년이었고, 2008년까지 남극점에 걸어서 도달한 여성 탐험가가 세계에 다섯 명 정도였다. 1994년에 세계 최초로 남극점까지 1200km를 단독으로 걸어서 도달한 노르웨이의 여성 탐험가는 ‘리브 아르네센(Liv Arnesen)’이다. 나는 2008년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완등했다. 100여 명의 에베레스트 한국 등정자 중 여성으로서는 여덟 번째였다. 남극을 탐험한 여성은 에베레스트보다 훨씬 적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남극’은 유럽과 북미 중심의 탐험 역사이며, 이런 종류의 탐험 영역엔 여성의 활동이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나를 움츠러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 스스로도 리브의 책을 읽기 전엔 남극 탐험과 같은 것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란 인식이 있었다. 횡단을 위해 내가 다시 남극에 돌아온 2024년은 리브의 남극점 도달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리브의 탐험 이야기는 내게 적지 않은 동기부여가 됐다. 리브를 처음 알게 된 건, 2004년이다. 남극 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를 등반할 때 광화문의 교보문고에서 ‘남극’을 검색해 급하게 챙겨간 책이 그녀의 탐험기였다. 2001년 리브와 앤 밴크로프트(Ann Bancroft)가 연을 이용해 풍력을 사용한 스키 세일링으로 남극 대륙을 횡단(2744km)한 여성 최초의 역사를 기록한 남극 탐험기였다. 바람을 잘 타는 날엔 하루에 200km도 이동이 가능했다. 남극에서 이 책을 읽고 호기심이 더욱 증폭됐고, 그 후 남극과 북극 탐험에 성공한 박영석 대장님과 함께 등반하며 배운 것은 계획을 실행하는 원동력이 됐다. 남극 같은 혹독한 자연에서 두 달 넘게 지내겠다는 결심은 하나의 이유로는 부족하다. 남극 최고봉을 등정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의 얼어붙은 창밖에 끝없이 펼쳐진 하얀 수평선을 보며, 둘이 나란히 걷고 있는 리브와 밴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시에 내가 다시 남극에 돌아온다면 나도 그들처럼 누군가와 함께 저 끝을 향해 걷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처음부터 혼자 떠날 계획은 없었다.
이렇게 남극 탐험사와 최초의 기록을 나열해 적게 되면, 최초의 기록을 세우기 위해 혼자 떠났을 것이란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끔 그런 황당한 질문을 듣기도 했다. 기록을 위해 남극이란 거친 대자연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으며 전혀 효율적이지도 않다. 귀동냥이건 책에서든 먼저 길 위에 섰던 이들로부터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용기 내!’라는 용기의 메시지를 느꼈다.
리브와 앤의 책에서 남극을 꿈꾸는 데 좋은 영감이 됐던 글귀를 적으며 오늘 글을 마무리한다. “삶은 얼음 사막 위의 드넓은 백지와 같고, 그 길을 그려나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우리는 얼음 사막을 걷는다’ 중에서)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