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져야 할까…? 일단 상황은 이래. 몇 달 전에 친구가 소개팅할 생각 없느냐고 묻더라고. 난 연애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어. 근데 친구가 제발 한 번만 해주면 안 되냐고 자꾸 부탁을 하는 거야. 아마 녀석이 소개팅 성사를 호언장담하고 어떤 대가를 받았던 것 같아. 그래도 난 여자 만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계속 거절했더니, 글쎄 막무가내로 단톡방을 만들더니 그녀와 나만 남겨두고는 퇴장해 버린 거야. 어이가 없었지만, 매너는 지켜야 하잖아? 일단 인사를 했지.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홍혜화라고 합니다. 김남우씨 맞으시죠?” “아 예….” 사실 대충 인사만 나누다가 흐지부지 마무리할 생각이었어. 근데 갑자기 그녀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거야. “죄송하지만 곧 ‘티젠전’이 시작돼서 그런데요, 나중에 대화하면 안 될까요? 이 대목에서 나는 눈을 의심했지. ‘티젠전’이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 프로게이머팀 ‘T1(티원)’과 ‘젠지’의 경기를 줄여 부르는 말이거든.
“혹시 ‘롤’ 좋아하세요?” “그럼요, 저는 T1 팬이에요.” “T1 팬입니다. 페이커 선수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저도예요! 페이커는 살아있는 전설이잖아요! 그러면 혹시 작년 결승 보셨어요? 4세트 사일러스요!” “와 대박! 당연히 봤죠!” 사실 살면서 ‘롤’을 좋아하는 여자를 본 게 처음이었어. 너무 반갑더라고. 함께 ‘티젠전’ 중계를 보면서 대화창에서 신나게 떠들었지. 물론 그때까지도 소개팅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근데 대화하다 보니 그녀가 또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챙겨 본다지 뭐야?
“남우씨 솔직히 말하세요. 토트넘 팬이에요, 손흥민 팬이에요?” “솔직히 손흥민 팬이죠.” “저도 손흥민 팬인데, 응원하는 팀은 맨유예요.” 내가 좋아하는 롤과 해외 축구를 다 좋아한다고? 취향이 맞는 여자를 태어나 처음 본 거야. 자연스럽게 소개팅으로 이어졌지. 막상 만나 보니 채팅보다는 수줍음이 되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게 또 반전 매력처럼 느껴지더라고. 몇 번의 만남 이후 연애를 시작했지. 연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이렇게 된 건 어찌 보면 운명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어? 몇 달간 정말 즐거웠어. 근데 만나면 만날수록 조금씩, 위화감이 느껴지는 거야.
여자 친구는 실제로 만났을 때는 롤과 해외 축구 이야기를 잘 안 했어. 아무리 대화 주제로 수차례 꺼내도 호응 수준에서 멈춘다고 해야 하나? 한번 의식하니까 그런 모습이 계속 보이더라. 근데 카톡으로 대화할 땐 또 달랐지. 채팅으로는 전문가인데, 막상 만나면 얘기를 잘 못 한다. 뻔하잖아? 만나서 추궁했어. 그제야 미안하다면서 말하는데, 충격적이더라고. “사실 오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챗GPT 써서 아는 척한 거야. 맞아. 사실 나 롤이나 해외 축구 잘 몰라. 미안해 오빠.”
어이가 없더라. 대단하기도 하고. 솔직히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 진짜 자연스러웠어. 참 무서운 세상이야. 아무튼, 속은 게 너무 화가 나서 그날 바로 집에 들어가 버렸어. 여자 친구가 울며불며 딱 5분만 얘기할 기회를 달라고 붙잡아도 냉정하게 가 버렸지. 그랬더니 그날 밤 장문의 카톡이 오더라고.
“오늘 오빠한테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 많이 울었어. 처음에 오빠랑 카톡방에 남겨졌을 때 솔직히 불안했어. 오빠가 인사만 하다가 그냥 카톡방을 나가버릴 것 같았거든. 그래서 AI를 이용한 거야. 오빠가 내 거짓말에 상처받은 건 당연해. 그래도 오빠를 속이면서까지 만남을 이어가고 싶었던 건, 그만큼 많이 좋아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지만, 오빠와 함께한 시간은 내게 너무 소중했어. 오빠가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하게 됐고, 오빠가 웃을 때 나도 행복했어. 오빠, 내가 오빠를 속인 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오빠가 나에게 실망해서 헤어지자고 해도, 전부 받아들일게. 그래도 오빠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디 나를 정말 사랑했던 순간들을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줘.”
솔직히 울컥했어. 결국 용서하고 다시 만나게 됐지. 근데 어제, 우연히 여자 친구의 휴대폰을 빌려 쓰다가 보고 만 거야. 챗GPT 이용 기록을 말이지. 내게 보냈던 그 장문의 사과글도 챗GPT가 써준 거였더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다.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이 정도면 헤어져야 하는 수준 아닐까? 아니면 그냥 화 한 번 내고 넘어갈 정도의 일일까? 고민이야. 헤어져야 할지 어떨지.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은 ‘GPT-5’ 사용 한도를 초과하셨습니다. 일정 시간 뒤 다시 시도하시거나 Plus로 업그레이드해 주세요.”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