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글판에 걸린 문구입니다. 이재무 시인의 시 ‘나는 여름이 좋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름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성장하는 시간이라는 거죠. 이 시구를 볼 때마다 ‘여름의 속성을 참 잘 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더위를 많이 타는 저에게 여름은 에너지가 분출하는 그런 계절이 아닙니다. 뙤약볕 아래 뻗기 직전이고, 불쾌지수가 쑥쑥 자라고,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무기력함이 번지고, 땀이 솟는 시기입니다.
입추(立秋)가 지났는데도 햇볕은 따갑습니다. 24절기 가운데 입추는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를 일컫지만, 그런 ‘입추 매직(magic)’은 진작에 옛말이 됐습니다. 인터넷에는 입추가 ‘입 다물어. 추워지려면 아직 멀었어’를 줄인 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돌고 있습니다. 올여름 폭염의 기세를 묘사하는 데 ‘불볕’ ‘찜통’ ‘가마솥’으로는 부족해서, 신문과 방송 뉴스에는 ‘사상 최악’ ‘역대급’ ‘살인적’ 같은 수식어가 동원됐습니다. 저는 이해인 수녀가 쓴 ‘여름 일기’ 속 표현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한 태양 아래.’
그래도 지난주부터 밤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아침 출근길도 더위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닙니다. 이번 주 중반 비가 내릴 때에는 낮 기온이 제법 떨어졌습니다. 비가 그치고 나서 원상 복귀하기는 했지만요.
오세영 시인의 작품을 펴 봅니다. “8월은/ 정상에 오르기 전 한번쯤/ 녹음에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 산을 생각하는/ 달이다.”
여름 한복판에서 단풍과 가을 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름철 흘린 땀이 가을에 어떤 결실로 돌아올지 생각해 보고, 다가오는 가을의 조용한 숨결을 마음속에 품으며 시간의 흐름을 느껴보는 거 아닐까요. 정점에서 그다음 순간을 떠올리고 내면을 성찰하며, 사색의 문턱을 넘어서는 거 아닐까요.
그나저나 일주일 후면 처서(處暑)입니다. ‘처서 매직’과 함께 마법처럼 시원한 기운이 주위를 감싸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기상청 일기예보를 보니 그럴 거 같지는 않네요. ‘백로(白露) 매직’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