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물건에 곧잘 짧은 글을 적어두었습니다. 이를 기물명(器物銘)이라 합니다. 검과 벼루, 병풍이나 거문고 같은 값나가는 물건은 물론 세숫대야·베개·쓰레받기 같은 것까지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학자 남명 조식은 늘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무관이 들 법한 장검은 아니었습니다. 칼집이 있는 작은 칼. 조식은 이 칼에 경의도(敬義刀)라 이름을 붙여두고는 ‘공경은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고 의로움은 밖으로 시비를 가리게 한다’는 뜻의 기물명을 적어두었습니다. 덕분에 날카로운 칼끝은 상대가 아닌 늘 자기 스스로를 향할 수 있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파리채에도 기물명을 적었습니다. ‘휘둘러 쫓아내되 잡지는 않는다. 다시 오면 또 휘두르지만 그래도 가지 않으면 그냥 둔다’는 내용. 파리채 하나에도 그의 사유가 설핏 담겨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정약용은 파리와 달리 모기는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았을 거라 추측됩니다. 호랑이보다 뱀보다 두렵다며 모기를 증오하는 마음을 담아 ‘증문(憎蚊)’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물명의 끝은 묘비명이 아닐까 합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온전히 담긴 짧은 글을 새기는 일이니까요.
또 옛사람들은 즐겨 읽는 책에도 자신만의 고유한 표지를 남겼습니다. 이를 장서표(藏書票)라 합니다. 주로 책의 면지에 소장자 이름을 적어두는 것입니다. 이름만 덩그러니 적는 건 아닙니다. 짧은 문장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예술 작품의 형태. 서양에서는 판화를 찍어 우표처럼 붙이는 방식으로 전해졌고, 동양에서는 인장을 찍는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라틴어 ‘Ex-libris’라는 문구가 국제 공통 표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장서표에 더해 책의 주요 내용이나 인상적인 구절을 적어두면 진정한 개성을 구현하는 ‘나만의 책’이 됐던 것입니다.
물론 요즘 시대에 장서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닌 책 한 귀퉁이에는 종종 뭔가가 적혀 있습니다. 책을 구매한 날짜나 서점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가 가장 흔하고, 혹은 책을 선물해 준 이의 이름과 함께 당시의 감정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물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정하고 물건에 글자를 아로새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접착식 메모지를 사용하면 한결 수월해집니다. 저는 한때 냉장고 문짝에 ‘가는 길보다 돌아오는 길이 언제나 더 멀다’라는 문장을 적어둔 일이 있습니다. 그만 좀 먹자는 뜻이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든 얼마간의 부족함을 느끼며 살든, 지금 내가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꼭 필요합니다. 사물의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는 마냥 감상적인 일에 그치지 않고 나를 향한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지로 돌아옵니다. 지금 한번 주변에 있는 것들을 찬찬히 둘러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