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열린 퍼포머티브 메일 콘테스트 참가자들. /인터넷 캡처

초록색 말차 라테를 손에 들었다. 귀에는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유선 이어폰이 꽂혀 있고, 목에는 역시 더 이상 쓰는 이가 드문 필름 카메라를 걸었다. 어깨에 걸친 천 소재 에코백에는 요즘 폭발적 인기인 ‘라부부’ 인형이 달려 있고, 안에는 즐겨 듣는다는 인디 밴드의 LP판이 들어 있다. 몸에 꼭 맞는 티셔츠에는 ‘걸 파워’ 등 페미니스트 문구가 인쇄돼 있고, 헐렁한 청바지 뒷주머니에는 시간 날 때면 언제든 꺼내 읽는다는 시집이나 고전소설, 에세이 종이책이 꽂혀 있다. 인스타그램, 틱톡 등 소셜미디어(SNS)를 도배하고 있는 ‘퍼포머티브 맨(performative man)’ 영상과 이미지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이다.

퍼포머티브 맨은 겉모습만 보면 ‘에겐남의 끝판왕’이랄 수 있다. MBTI에 이어 최근 젊은 층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테토-에겐 이론’은 인간의 성격과 연애 유형을 여성·남성 호르몬을 기준으로 나눈다. ‘에겐’은 여성적 특징을, ‘테토’는 남성적 특징을 나타낸다.

에겐남은 여성적 특징을 가진 남성을 지칭한다. 이들은 섬세하고 감성적이며,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연애할 때는 상대 기분을 잘 맞춰주고 다정다감하며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특징을 보인다. 패션과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퍼포머티브 맨의 롤모델로 꼽히는 아이돌그룹 출신 영국 가수 해리 스타일스. /인터넷 캡처

퍼포머티브 맨은 실제로는 에겐남이 아니면서 에겐남인 척하는 남성이다. 쉽게 말해서 ‘보여주기식 남성’이라고 할 수 있다. ‘퍼포머티브’는 ‘연기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 ‘perform’에서 파생했다. 퍼포머티브 맨은 여성이 선호하는 남성 모습을 연기한다.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힙하고 감성적·개방적이며 훌륭한 취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도록 스스로를 연출한다는 비난 내지는 조롱이 담긴 표현으로 통용됐었다.

하지만 이제 ‘퍼포머티브 맨’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비난과 조롱을 넘어 재미를 주는 소재로 확산되고 있다. 밈(meme·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모방되는 문화 요소)으로 유행한다. 풍자이자 놀이로 소비되고 있다. 퍼포머티브 맨의 전형적 특징을 과장된 연출과 세밀한 디테일로 풍자한다.

그래픽=송윤혜

‘퍼포머티브 맨 쇼핑 리스트’<표 참조>가 SNS에 오르내리는데, 이를 충실하게 혹은 과장되게 연출한 사진과 영상이 SNS를 뒤덮고 있다. 책을 두 권씩 들거나, 말차 라테는 미니멀하고 세련된 납작한 뚜껑이라야지, 대중적 테이크아웃 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뚜껑은 실격이라는 식이다.

퍼포머티브 맨의 인기는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번졌다. 미국 뉴욕·시애틀·시카고, 호주 시드니·멜버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등 세계 곳곳에서 ‘퍼포머티브 메일(남성) 콘테스트’가 속속 열리고 있다. 가장 퍼포머티브 맨다운 참가자를 뽑는 경연 대회다. 퍼포머티브 남성상을 유쾌하게 풍자하는 퍼포먼스로 많은 이가 몰려 즐겼다.

참가자들은 말차 라테, 에코백, 줄 이어폰 등을 소품 삼아 퍼포머티브 맨의 모습을 선보였다. 일부 참가자는 책을 거꾸로 들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책을 즐겨 읽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읽지 않는다는 점을 희화한 연출이었다.

시애틀에서 열린 경연 대회에서는 바지폭이 넓은 와이드 진을 입고 유선 이어폰을 끼고 LP 레코드판 재생에 필요한 턴테이블까지 들고 나온 20대 남성 마커스 저니건이 우승했다. 우승 트로피는 라부부 인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