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골 서늘한 남극의 냉기가 자꾸만 그립다. 요즘 한국은 영상 35도를 웃돌며 한여름의 절정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게 춥던 남극에 대한 기억이 시원하게 편집되는 기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힘든 게 잊히니 또 다음의 탐험을 계획하는지도 모르겠다.
남극은 여름에도 해발고도가 2835m인 남극점(남위 90도) 주변 온도가 영하 35도를 밑돈다. 강한 블리자드에 체온을 빼앗겨 혼자 아무 데서나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것처럼 힘든 날도 있었다. 이런 날엔 극도의 예민함과 두려움의 힘으로 버텼다. 이미 2023년 남극점까지 1130㎞를 51일 동안 건너며 경험적 지식이 쌓여 있었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면서도, 약 1700㎞가 넘는 출발선 앞에 다시 섰다.
비행기가 유니언 빙하에 착륙하기 한 시간 전부터 스키 부츠를 신고 보온 의류를 입었다. 푼타아레나스에서 4시간 만에 착륙한 유니언 빙하(해발고도 680m)의 기온은 영하 20도였다. 바람이 없어 포근하게 느껴졌는데 영상 10도인 푼타아레나스에 있다 와서 그런지 장갑을 꼈는데도 미처 적응하지 못한 추위에 넷째 손가락의 뼈가 저렸다. 몸에 기록된 추위의 통증이 되살아난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ALE(남극 물류 항공 대행사)가 설치해 둔 유니언 캠프까지 지프를 타고 25분을 이동했다. 2004년에 남극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를 등반하러 왔을 때는, 조금 더 내륙인 ‘패트리엇 힐’이 전진기지였다. 1993~1994년에 허영호 대장의 원정대도 이 패트리엇 힐(inland start)에서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 나의 원정과 출발 지점이 달랐다.
2003~2004년 박영석 대장 원정대는 나와 코스가 같아 내륙 해안의 끝인 허큘리스 인렛(inner coastal start)에서 남극점까지였다. 허큘리스 인렛에서 출발하면 패트리엇 힐을 지나기 때문에 약 100여 ㎞가 더 멀다. 허영호 원정대는 1996~1997년, 해안가인 버크너 섬(coastal start)에서 약 1314㎞를 걸어 두 번째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박영석 원정대 또한 2010~2011년에 태양열 스노모빌로 두 번째 남극점에 도달했다. 두 대장님과 나의 가장 큰 차이는 대장님들은 4~5명의 팀으로 움직였고, 나는 혼자라는 점이다.
허영호 대장님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박영석 대장님과는 2006년부터 에베레스트만 4번을 등반했다. 그때 귀동냥했던 남극 얘기들은 ‘나도 잘 준비하면 해 볼 수 있겠다’는 꿈을 꾸게 해주기 충분했다. 2년 전 원정에서 2003년 박영석 대장님 원정대의 GPS 좌표를 가져와 나와 몇 ㎞의 거리를 두고 걷는지 확인했다. 그땐 선배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면, 이번 횡단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기 위한 여정이다.
2004년에 남극 최고봉을 등정하고 비행기 창밖의 하얀 수평선을 보며 ‘남극에 다시 돌아온다면 저 끝을 향해 걷고 있겠구나!’라고 마음먹었다. 2년 전 이곳을 빠져나갈 땐, ‘인생에 이렇게 힘든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스물넷 시절에 꾸었던 꿈을 지키러 ‘다시는 오지 않겠다’던 곳에 또 왔으니 운명 같지만, 드라마 같은 굴곡들이 겹겹한 세월이다.
유니언 빙하에서 두 밤을 보내며 최종 운행 모드로 준비를 마쳤다. 남극에 들어온 지 3일째, 트윈 오터(De Haviland DHC-6 Twin Otter)라는 경비행기를 타고 허큘리스 인렛(해발고도 160m)에 도착했다. 눈에 스키를 꽂아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하고 100㎏의 썰매를 몸에 연결했다. 2024년 11월 8일 14시 40분(칠레 현지 시각)! ‘남극 대륙 단독 횡단’이 시작되었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