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에서 내려다본 만다파 리츠칼튼 리저브 전경. /김지호 기자

정글, 대자연, 동남아. 언제나 피하고 싶은 여행지였다. 덥고 끈적끈적하고, 날것의 이미지가 밀려왔다. 내 기억 속 발리는 꾸따 해변, 거친 파도, 끊임없는 흥정 그리고 얄궂은 칵테일뿐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조용하고 차분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곳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실로 엮은 소원팔찌를 받았을 때, 낯선 풍경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 짧은 환영의 의식이 내 마음을 누그러뜨린 걸까. 변화는 소리 없이 찾아왔고 그 중심엔 익숙한 위스키 한 잔이 있었다. 히비키였다. 늘 알던 맛이지만, 이곳의 공기와 어울리니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오전 11시 40분. 고무보트가 강가에 닿았다. 멀리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암바르 바의 믹솔로지스트(칵테일 제조 전문가) 아디였다. 그가 건넨 건 히비키 21년 하이볼 한 잔. 물기 어린 래시가드 위로 뜨거운 정글의 공기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유리잔 속 길쭉한 각얼음은 강한 햇살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 모금. 사과와 애플민트의 산뜻한 기운이 입안을 감쌌다. 몸속에 온기가 퍼지자 긴장도 사르르 풀렸다.

리조트 내 전용 버기를 타고 객실로 이동 중인 모습. /김지호 기자

◇감각이 살아나는 공간

우붓의 리츠칼튼 리저브, 만다파(Mandapa). 산스크리트어로 ‘성소’를 뜻한다. 전 세계에 단 다섯 곳뿐인 리츠칼튼의 최상위 리저브 브랜드 중 하나. 논과 강, 사원과 전통이 함께 숨 쉬는 생태계처럼 설계된 이곳은 자연이 주도권을 쥐고 인간의 감각을 조율해 나가는 공간이었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이미 ‘보법’이 달랐다. 공항 컨베이어 벨트 위로 짐이 나왔다. 직원은 캐리어를 하나하나 쿠션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충격을 흡수하려는 배려였다.

공항을 벗어나자 풍경이 달라졌다. 시멘트 건물은 야자수와 논두렁으로, 아스팔트는 강줄기와 들판으로 바뀌었다. 차로 약 1시간 반. 비좁고 굽은 골목길을 지나 이끼 낀 돌담 너머로 고대 사원을 닮은 리조트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같았다. 전통 마을과 사원을 본뜬 설계. 경외감이 들 만큼 크고 고요했다.

리조트 내 버기를 타고 도착한 프라이빗 빌라.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욕실 온수를 틀었다. 샴푸를 짜는 순간 계피와 레몬그라스 향이 욕실 가득 퍼졌다. 비누, 로션, 선크림, 모기 퇴치제까지 모두 천연 허브로 만들었다. 벌레를 없애는 대신 공존을 택한 방식이었다.

침대 위에는 플루메리아 꽃과 객실 버틀러의 손 편지가 놓여 있었다. 탁자엔 하쿠슈 18년 한 잔이 탄산수와 함께 곁들여졌다. 문 앞에서 마주친 투명한 도마뱀도 징그럽기보단 귀여웠다. 작은 설치미술처럼 느껴졌다. 치밀하게 관리된 야생. 그 낯선 질서가 오히려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발리에서 채집한 식물과 꽃. 칵테일 재료로 활용한다. /김지호 기자

◇에칸의 정원에서

둘째 날 아침, 만다파의 포리징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우붓 파우산 마을에 있는 ‘부아한 공동체’ 농장. 리조트에서 차로 30분 거리다. 10가구가 함께 운영하며 매일 아침 10시부터 당일 저녁과 이튿날 아침 식재료를 직접 채집한다.

가이드는 만다파의 수석 셰프 에칸이 맡았다. 2007년 요리를 시작한 그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로컬 식재료에 누구보다 밝고, 활달하면서도 섬세한 성격이 느긋한 풍경과 잘 어울렸다. 농장으로 향하는 차 안엔 김동률의 ‘취중진담’이 흘렀다.

농장에 들어서자 감귤·라임·파파야 향이 코끝을 스쳤다. 마침 감귤 시즌이었다. 맛은 오렌지와 라임의 중간쯤. 에칸은 “지금 이 풀, 이 나뭇잎, 이 꽃이 모두 내 요리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에게 이 농장은 영감의 원천이자, 식재료의 근원이었다.

에칸은 판단(단맛 나는 동남아 잎), 샴파카(향기로운 열대 목련), 파차(신에게 바치는 장미꽃) 같은 식물을 하나씩 소개했다. 익숙지 않은 잎과 꽃도 망설임 없이 입에 넣게 했다.

그러다 그가 작은 꽃봉오리 하나를 건넸다. ‘일렉트릭 데이지’였다. 입에 넣는 순간 혀끝이 짜릿했다. 마라 소스처럼 얼얼했고 침샘이 저릿하게 반응했다. “전기 맛이 나죠?” 에칸이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식물 성분이 침샘을 자극해 전기 자극처럼 느껴지는 꽃이다. 혀끝에 퍼진 얼얼함은 후추처럼 알싸한 긴 여운으로 남았다. 그제야 판단의 단맛, 샴파카의 은은한 향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포리징 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수확한 열대 과일들. /김지호 기자

과일도 다양했다. 뱀 비늘처럼 생긴 스네이크 프루트, 내부가 외계 생명체처럼 생긴 칼라바시. 에칸은 식물들을 하나씩 집어 들고 장난감 고르듯 입에 넣었다. 그 눈빛엔 장난기와 자부심이 동시에 묻어났다.

팬데믹 시절, 에칸은 버려질 뻔한 바나나를 모아 잼과 케이크, 칩을 만들어 팔았다. “그땐 음식이 생존이었어요. 신에게 바치는 바나나라서 버릴 수가 없었죠.” 그에게 바나나는 단순한 열대 과일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순환을 상징하는 재료이자 그의 철학이 담긴 식재료였다. 음식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고, 에칸은 요리로 지역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의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 한쪽에선 수석 믹솔로지스트 아디가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칼라바시 과육을 조심스럽게 긁어낸 뒤 얼음과 함께 대나무 잔에 로쿠 진을 따랐다. 과육의 부드러운 질감과 차가운 온도, 진의 풍미가 입안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처음 맛보는 조합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 스쳐갔다.

리조트 내 쿠부(Kubu) 식당. 대나무 구조물로 둥지처럼 설계된 파인다이닝 공간. /김지호 기자

◇칵테일 한 잔의 의식

오후, 풀 바에서는 ‘Suntory × Tri Hita Karana’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진행은 아디가 맡았다.

의식은 눈을 감고 명상과 호흡으로 시작됐다. 산토리의 ‘조화’와 발리의 ‘트리 히타 카라나’는 어딘가 닮아 있었다. 맛보다 사람, 공간, 관계를 먼저 이야기하는 철학. 그날의 술은 그날의 공기와 사람으로 완성된다는 믿음이었다.

첫 번째 잔은 히비키 하모니 칵테일이었다. 사라삭 꽃 증류수, 쿠쿰안 코디얼(레몬 바질 시럽), 카피르 라임 잎이 들어갔다. 허브 줄기를 길게 꼬아 잔 위에 얹은 가니시는 장식이라기보다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아디는 “같은 레시피도 공기와 사람, 장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했다.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꽃물과 라임 향이 비강을 타고 퍼졌고 그 뒤를 따라 위스키 특유의 꿀 같은 단향이 밀려왔다. 입에 머금자 장미수를 마신 듯한 부드러운 여운이 퍼졌다.

리조트 내 메인 풀 바 옆에서 야마자키 12년을 활용해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 /김지호 기자

위스키에 익숙하지 않은 참가자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짧은 ‘음’ 소리 하나가 모든 말을 대신했다.

하쿠슈 18년에는 타마릴로 과육, 케망기(동남아 바질), 비건 폼이 더해졌다. 산미와 스모키가 밀고 당기며 깊고 감칠맛 나는 칵테일을 완성했다. 하쿠슈는 원래 그 자체로 완결된 위스키다. 하지만 이 한 잔은 익숙한 얼굴인데,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야마자키 12년에는 아카르 뿌리 셀처가 더해졌다. 흙과 약초의 냄새가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고 위스키의 단맛과 뿌리식물의 질감은 또렷이 갈렸다. 밤새 마시고 싶은 맛이었다.

익숙했던 위스키가 낯설게 다가왔다. 분위기와 재료, 그리고 사람의 손길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감각이 조용히 다시 정렬되는 느낌이었다.

아융강 래프팅 체험 출발 지점. /김지호 기자

◇빗속의 아융강, 잊지 못할 하이볼

셋째 날 아침, 클래식 폴크스바겐 오픈카를 타고 아융강 상류로 향했다. 도착 직전, 스콜이 한 차례 휘몰아쳤다. 수증기가 오르고, 강물은 더 묵직해졌다.

고무보트에 올라 구명조끼를 조이고 노를 잡았다. 출발하자마자 급류. 바위에 부딪차고 물이 튀었다. 긴장이 풀릴 무렵 다시 낙차. 그 리듬이 반복됐다. 다시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며 숲의 냄새가 짙어졌다.

제티에 도착하자 아디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히비키 21년 하이볼이 들려 있었다. 사과와 애플민트 향, 그리고 깊고 두터운 위스키의 바디감.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한 잔이었다. 술은 ‘무엇을 마시느냐’보다 ‘어디서 마시느냐’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객실 테라스에서 즐기는 조식. 프라이빗 풀 너머로 정글이 눈에 들어온다. /김지호 기자

◇노을지는 쿠부, 마지막 한 잔

해가 지고 호텔 내 쿠부(Kubu) 레스토랑에 조명이 켜졌다. 멀리서 물소리와 곤충 소리가 낮게 깔렸다. 둥지처럼 엮인 대나무 좌석에 앉자 히비키 하모니를 베이스로 한 하이볼이 먼저 나왔다. 구아바 코디얼의 산미, 쿠삼바 해염, 해조류 펄이 한 잔 속에 담겼다. 음식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저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차가운 랍스터에 하쿠슈 12년 칵테일이 함께 나왔다. 구스베리 잎과 계피 향이 기름기를 걷어내듯 첫 입부터 입안을 정갈하게 정리해줬다.

이어진 생선 요리는 하쿠슈 12년을 니트로 내놓았다. 숯불에 살짝 그을린 듯한 고소한 향, 은은한 풀내음, 짭짤한 미네랄감이 위스키의 풍미와 겹치며 감각을 한층 끌어올렸다.

오리 요리가 나올 무렵 잔이 바뀌었다. 하쿠슈 18년 위스키였다. 훈연 향과 단단한 바디감이 오리 고기의 진한 육즙과 절묘하게 맞물렸다.

채소 요리로 입안을 잠시 환기한 뒤 돼지고기에는 야마자키 12년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이 곁들여졌다. ‘메수이(Mesui)’라는 향신료, 쌉쌀한 리큐르 아마로(Amaro), 그리고 커피 비터가 더해져 묵직하면서도 복합적인 쓴맛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소고기 요리에는 야마자키 18년이 니트로 따라졌다. 묵직한 과실 향과 짭조름한 육즙이 혀끝에서 번갈아 겹치며 단단한 여운을 남겼다. 술과 고기가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졌다.

마지막 밤, 테라스에 앉아 히비키 21년 하이볼을 마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소리가 숲 어딘가에서 은근히 흘러나왔다. 술맛은 첫날보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허전함까지 감싸주는 듯한 온기가 있었다.

그 마지막 한 잔에는 이틀 동안 축적된 공기와 향, 감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여운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몸속 어딘가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기억보다 느낌이 더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