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밤, 테라스에서 즐긴 히비키 21년 하이볼. /김지호 기자

위스키 애호가들은 대개 블렌디드보다 싱글몰트를 먼저 고른다. 어느 지역 증류소에서 만들었는지, 어떤 오크통을 썼는지 따진다. 블렌디드는 가볍고, 입문용이라는 인식에 갇혀 있다. 하지만 히비키는 그 틀을 조용히 빗겨갔다.

히비키는 산토리가 창립 90주년을 맞아 1989년에 출시한 블렌디드 위스키다. 여러 증류소의 몰트와 그레인 위스키를 조합해 만든다는 점에서 싱글몰트와는 방식이 다르다. 히비키는 야마자키와 하쿠슈의 몰트, 치타의 그레인 위스키를 블렌딩해 만든다.

‘히비키’는 일본어로 ‘울림’을 뜻한다. 서로 다른 개성이 부딪히는 대신 공명하며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병은 하루 24시간, 1년 24절기를 형상화한 24면 유리로 만들어졌다. 겉과 속 모두에 일본식 조화와 미학이 스며 있다.

히비키의 입문용 라인인 하모니는 꽃과 꿀 향으로 시작한다. 입안을 미끄러지듯 감싸는 오렌지 잼 같은 질감이 매력적이다. 21년, 30년으로 갈수록 잘 익은 과일 향이 선명해지고, 이어지는 미즈나라의 오묘한 나무 향이 술을 단정하게 정리해준다. 미즈나라는 일본 특유의 물참나무다. 샌달우드(백단향) 계열의 은은한 향을 내며 오래된 사찰 목재처럼 시간을 머금은 공기 같은 냄새가 난다. 글로벌 위스키 시장에서도 특히 주목받고 있는 나무 품종이다.

히비키는 블렌디드 위스키지만 얼음 없이 즐겨도 손색이 없다. 특히 21년과 30년 제품은 고숙성 스카치와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몰트 바에선 잔당 가격이 고숙성 싱글몰트를 웃도는 경우도 있다.

술을 다 마신 후에도 병은 자리를 지킨다. 꽃병이나 장식으로 쓸 만큼 예쁘고, 디자인에도 브랜드의 철학이 담겨 있다.

발리 우붓에서 마신 히비키 칵테일은 처음엔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두 번째 모금부터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우붓의 허브와 꽃, 열대 과일이 입안을 맴돌았고 마지막엔 뿌리식물의 개운함이 자리를 정리했다. 낯선 재료들이 얼굴을 조금 바꿔놨을 뿐 그 안의 히비키는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