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삼국지에 처음 매혹된 건 초등학생이던 1960년대다. 지금은 사라진 세로쓰기 판형의 웅장한 ‘박종화 삼국지’에 빠져 살았다. 촉한 오호대장군 조자룡에 나를 투사해 상상 속 공방전으로 골방에서 몇 시간씩 혼자 놀아도 지루한 줄 모르던 ‘삼국지 키드(kid)’였다.

고교 1학년 때는 선생님이 칠판에 한문으로 일필휘지한 ‘출사표’를 읽고 제갈량의 충심에 감탄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들었던 최인훈 작가 강연 중 ‘제갈공명은 동아시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삼국지는 우리네 성장 과정의 보편적 통과의례였다. 그만큼 널리 읽혔고 지금도 사랑받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내로라하는 한국 유명 소설가들이 앞다투어 펴낸 삼국지가 모두 합쳐 수천만 부 팔렸다.

‘삼국지 산업’은 소설과 웹소설을 넘어 만화와 드라마, 영화와 컴퓨터 게임에까지 이른다. 한국어로 쓰인 삼국지 관련 도서가 7000종이 넘는다. 삼고초려, 읍참마속, 출사표, 계륵, 백미 등 삼국지에서 나온 수많은 어휘가 한국어 일상용어로 쓰일 정도로 영향력이 넓고 깊다. 삼국지가 원산지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읽힌다는 설(說)도 있다.

하지만 영웅호걸들의 쟁패전으로 흥미 만점 역사 설화인 삼국지엔 독성(毒性) 콘텐츠가 다수 녹아있다. 삼국지의 폐해는 적지 않은 독자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진수의 ‘정사(正史) 삼국지’와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중국인이 그렇게도 존경하는 관우나 제갈량의 실상은 실제 역사서에선 자못 빈약하다. 중국에선 삼국지연의가 ‘사실이 7할이고 허구가 3할’이라고 평하는데 나는 정반대로 ‘사실이 3할, 허구가 7할’을 넘는다고 본다. 역사소설은 허구와 팩트의 경계를 넘나들곤 하지만 창작의 자유를 인정해도 삼국지의 과장법과 역사 비틀기는 유별나다.

비판적 문헌 연구로 드러난 삼국지의 현장은 앙상할 정도다. 삼국지의 발단인 도원결의는 있어 본 적이 없고 ‘중국 4대 미인 초선’은 허구의 인물이다. ‘절세 영웅’ 관우나 조자룡, 여포는 평범한 장수에 불과했다. 제갈량은 행정가로선 유능해도 군사적 천재와는 거리가 멀어 전투에서 자주 졌다. 삼국지의 클라이맥스인 적벽대전은 소설의 해당 분량이 정사의 일백 배에 달해 주요 에피소드는 거의 허구다. 상상을 뛰어넘는 삼국지의 ‘현실 재창조’다.

‘역사소설이 재밌으면 그만이지 너무 실증적으로 접근하면 무엇이 남겠나’라는 반론도 일리는 있다. 삼국지는 동아시아 민중이 수백 년 사랑해 온 역사 설화로서 우리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는 항변도 가능할 터.

그럼에도 삼국지에 내장된 중화주의와 봉건적 충효의리관, 권모술수의 정당화가 초래한 현실적 폐해는 적지 않다. 중화사상과 성리학적 봉건 권력이 ‘만든’ 관우와 제갈량의 아름다운 이미지. 그 이미지를 찬미한 주자와 소중화의 이름으로 맹종한 조선 선비들. ‘삼국지 문화산업’은 중화 패권주의에 우리를 순치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해 온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우리네 감수성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준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압도적 영향력을 끼친 삼국지에 대한 ‘비판적 읽기’도 필요하다. 삼국지연의는 한족(漢族) 왕조의 정치적 상징조작 분위기에서 ‘창작된’ 편향적 역사소설이라는 인식이 그 출발점이다.

문화예술로 다가온 역사 설화가 참된 역사 인식을 오히려 방해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왜 한반도 삼국지(신라·고구려·백제)보다 중국 삼국지를 더 가깝게 느끼는가. 수백 년간 확대 재생산된 한국 사회의 ‘삼국지 열풍’과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뿌리 깊은 ‘소국(小國) 콤플렉스’는 서로 무관한가. 삼국지로 밤낮을 지새우던 열혈 ‘삼국지 키드’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