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쓰기 싫어 달아나려는 나의 엉덩이를 붙여놓은 음악이에요.”
누구에게나 꼭 해야만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시작이 어려운 일이 있다. 공부, 일, 글쓰기, 청소, 설거지…. 종류는 달라도 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는 마음은 비슷하다. 이럴 때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 ‘로파이(Lo-Fi)’ 음악이다.
로파이는 저음질(Low Fidelity)을 의미한다. 로파이 음악은 일부러 바이닐(LP) 특유의 지지직거리는 소리, 빗소리, 파도 소리 등의 잡음을 섞어 결함이 느껴지게끔 만든 음악 장르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질이 특징. 70~90BPM의 느린 템포와 단조롭게 반복되는 비트, 감미로운 코드 진행, 빈티지한 잡음이 특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국내에서는 2020년대 들어 MZ 세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난 8일 저녁 9시, 유튜브 채널 ‘로파이걸(Lofi Girl)’의 ‘로파이 힙합 라디오’ 영상에는 동시 접속자 1만9000명이 몰렸다. 구독자가 1500만명인 이 채널은 조회 수가 최다 1억 회를 넘긴 영상도 있다. ‘일하기 싫을 때 듣는 적당히 신나는 로파이 힙합’, ‘생산성을 높여주는 완벽한 배경 음악’ 등 국내 유튜버들이 운영하는 로파이 스트리밍 채널의 영상들도 조회 수가 각각 수천만 회에 달한다.
로파이 음악의 ‘효험’을 증언하는 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할 때면 항상 로파이를 재생한다는 개발자 김모(33)씨는 “헤드폰을 끼고 로파이를 틀면 자동적으로 ‘생산성 모드’가 된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모(26)씨는 “친구가 추천해준 로파이를 접하고 그날 밤 과제를 다 끝내는 기적 같은 경험을 한 후로 (로파이를) 과제 메이트로 쓰고 있다”고 했다.
로파이 음악이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은 실제 실험을 통해 뒷받침된다. 2023년 미 샌프란시스코 고등학생 26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로파이를 들은 학생들은 아무 소리를 듣지 않는 무음 상태보다 평균 9%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연구진은 “로파이의 반복적이고 차분한 리듬이 집중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고 설명했다. 2022년 덴마크에서 진행된 실험도 결론이 비슷하다. 로파이를 15~45분 들은 참가자들은 그렇지 않은 참가자보다 심박이 더 안정되고 주의 집중력이 유의미하게 향상됐다.
전문가들은 로파이 음악이 MZ 세대의 정서적 안정을 위한 ‘심리적 배경음’으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한다. 임명호 단국대 교수(심리학)는 “젊은 세대는 만성적인 불안과 긴장 속에서 지쳐 있는 경우가 많은데, 로파이 음악은 복잡한 가사나 자극적인 멜로디 없이 편안하고 소박한 분위기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독립연구자 정진주는 논문 ‘로파이 음악의 미학적 특성과 경향’에서 “로파이 힙합 유튜브 채널은 단순히 음악을 수동적으로 청취하는 공간을 넘어, 시청자 간 정서적 상호작용과 지지를 촉진하는 장으로 기능한다”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명예교수(심리학)는 “사회촉진이론에 따르면 나와 관계없는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수행 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며 “많은 이들이 동시에 로파이 스트리밍을 들으면서 형성된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가 안정감을 주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로파이 스트리밍 채널에는 누군지 모를 서로를 향한 응원 댓글이 빼곡하다. “지금 공부중인 모두 다, 꼭 이루는 바 다 이루시고 행복하길 바라요.” “이 영상에 머물다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불안이 사라졌으면 합니다.” “댓글들을 보니까 혼자가 아니란 기분이 들어서 좋네요. 같이 열심히 공부해봐요.” 어쩌면 이 다정한 소음이 우리를 덜 외롭게 만드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