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글을 말할 때 ‘뉴욕’보다 ‘런던’을 먼저 떠올린다면, 이 사람 때문일 것이다. 온라인 식당 예약 플랫폼 캐치테이블에서 2023~2024년 연속 전국 웨이팅 1위를 달성하고, 애인의 마음보다 변심이 빠르단 요식 업계에서 여전히 2~3시간씩 줄 서는 가게를 만든 사람. 이효정(52) 런던베이글뮤지엄 브랜드총괄디렉터(CBO) 이야기다. 최근엔 경제 뉴스에도 부쩍 이름이 오르내린다. 얼마 전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 JKL파트너스가 런던베이글뮤지엄을 운영하는 엘비엠과 주식 매매 계약을 체결하면서다. JKL파트너스가 엘비엠 지분 100%를 인수하는 것으로, 인수 가액은 2000억원 내외로 알려졌다.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3층 주택에 작은 런던이 펼쳐졌다. 이 디렉터의 집이다. 키보다 높은 창문에 층고 높은 거실, 조금은 삐걱거리는 듯한 마룻바닥과 라디에이터까지. 유럽의 오래된 옛 주택에 들어선 듯했다. 그때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이 디렉터. 그는 “집안에서도 늘 기세 좋게 있고 싶어 신발을 신는다”며 “비율 좋아 보이는 건 덤”이라고 했다.
런던의 카페가 나를 바꿨다
-왜 베이글 가게 이름이 ‘런던베이글뮤지엄’인가요. 베이글하면 누구나 뉴욕을 생각하지 않나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를 합친 것인데, ‘중량감’이란 관점에서 보면 공통점이 있는 단어예요. 남들은 그냥 ‘되어진’ 것만 보지만, 실은 뭔가가 되기까지 그 과정 속에 쌓아올려진 것들이 대단한 거잖아요. 매일의 성실함이 만들어낸 반복과 노력, 그 누적의 과정에서 축적된 레이어(층위)들을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베이글은 역사가 있는 데다, 빵 자체도 발효를 거쳐 밀도가 있죠. 뮤지엄은 더할 나위 없이 시간의 층위가 쌓인 공간이고요. 런던이란 도시도 제겐 그렇습니다.”
이 대표는 2017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카페 하이웨스트’를 차리기 전까진 식음료(F&B)와 완전히 무관한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패션 업계에 20년 가까이 종사하며 1세대 쇼핑몰 선두 주자로 활약했다. 지난달 나온 책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열림원)에서 그는 2011년 런던에서 만난 한 카페가 인생을 뒤흔들었노라고 고백한다. ‘료’는 그의 애칭이자 필명. ‘동료’의 ‘료’에서 따왔다.
-모든 건 14년 전 영국 런던 코번트가든 근처 ‘몬머스 커피(monmouth)’에서 시작됐다고 썼더군요.
“저는 그때까지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그 카페에서 알았습니다. ‘아, 나는 여행지에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너무나 자유스러웠던 내가 좋았던 거구나.’ 손님과 바리스타가 인종과 나이 상관없이 서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걸 보고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를 느꼈어요. 서울에 돌아가면 직업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직업까지 바꿉니까.
“서울에서 나름 열심히 일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안정적인 결과 값을 냈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나도 이런 바이브(기분)를 느낄 수 있는 공간에 있고 싶다. 이걸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런던에 머무르는 40일 동안 ‘내가 느낀 게 맞나’ 싶어서 매일 두 번씩 이 카페에 갔어요. ‘이렇게 살고 싶은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본금이랄지, 나름의 사업 노하우가 있어 가능했던 도전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34살 때까지 7평 원룸에 살았어요. 일을 꾸준히 해온 건 맞지만, 실패해도 상관없을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습니다. 실제 첫 카페인 하이웨스트는 당시 친구와 자본금 2500만원으로 시작했어요. 그중 꼭 사고 싶었던 커피 기계가 있어 그 값이 1000만원이었고, 나머지 천장 칠하고 에폭시 깔고 그런 모든 인테리어 작업은 직접 해 비용을 크게 아꼈습니다.”
매 순간 진짜의 나였을 뿐
그렇게 ‘저지른’ 연남동 주택가 뒤편의 카페 하이웨스트는 ‘베이커리 카페’의 성지가 됐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된 ‘오픈 트레이(빵을 개별 포장하거나 진열장에 두지 않고 접시 위에 두는 것)’, 3~4시간씩 카페 앞에 긴 줄을 서는 카페 웨이팅 문화까지. 모든 것의 시초였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광했다고 보십니까.
“그 카페는 정말 ‘있는 그대로의 저’였거든요. 평소에도 집에서 스콘이나 파운드 케이크를 굽고 진열장이 없으니 예쁜 빈티지 접시에 놓아뒀어요. 료’s 얼그레이 스콘. 종이에 네임펜으로 이렇게 써 두고요. 이걸 매장에서도 그대로 했어요. 접시와 의자까지 원래 제가 쓰던 것을 가지고 왔거든요. 실은 제 집을 보신 거죠. 색달라 보일 수밖에요. 하루에 한 명이라도 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웨이팅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고 알았죠. 아, 다들 ‘진짜’를 보고 싶어 하는구나.”
-그게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르게 태어났잖아요. 그래서 실은 ‘진짜의 나’만 보여주면 유니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들 ‘카페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요즘 트렌드는 이거잖아’처럼 잘되는 다른 것을 따라 합니다. 시작부터 2등을 자처하는 거죠. 사람들은 진짜의 유니크함을 보고 싶어하지, 누군가를 닮은 것을 구경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렇게 만든 또 다른 ‘진짜’가 2021년 안국동에 문을 연 ‘런던베이글뮤지엄’인가요.
“무식하리만큼 내가 있고 싶은 장소, 먹고 싶은 것을 어색함 없이 그대로 구현해 낸 장소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분과 교차점이 있어서 트렌드가 된 거죠. ‘부(富)를 축적하겠다’거나, ‘MZ를 향한 멋진 브랜딩을 해야겠다’는 계략(?)은 전혀 없었어요. 사실 저는 유튜브나 쇼츠도 잘 보지 않거든요. 남들이 알려준 지름길은 그 사람의 길이지, 저의 최단거리는 아니니까요.”
-런던베이글은 독특한 식감으로도 유명합니다.
“처음엔 ‘베이글 맛이 왜 이러냐’고 항의도 받았어요. 기존 베이글이 다소 퍽퍽하고 질기다면, 런던베이글은 찰기가 있어 쫄깃하거든요. 제가 첫 번째 소비자가 돼, 먹고 싶은 베이글을 상상했습니다. 떡의 쫄깃한 식감을 가진 베이글을 싫어하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봤어요. 1g 단위까지 재료를 엄선하고 반죽 뭉치기와 밀어내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최근 매각 소식으로 런던베이글의 정체성이 달라질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아마 런베뮤(런던베이글뮤지엄)를 2000억원에 매각하는 게 제 목표였다면 이렇게 일을 못 했을 거예요. 제 목표는 늘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 진짜의 나로 매일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매각은 런베뮤와의 안녕이 아닌 해외 진출이나, 지점을 더 완성도 있게 올리는 일을 잘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가 해왔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총괄 브랜딩’을 앞으로도 런베뮤에서 같은 직함으로 해나갈 겁니다.”
-살면서 실패한 적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중2 때까지 ‘왕따’였어요. 제가 지금 아는 팝송 대부분은 혼자 초등학교 때 조용히 그네 타면서 워크맨으로 들은 것들이에요(웃음). 어릴 때부터 뭔가 궁금한 게 많고, 엉뚱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물으면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으니, 혼자 조용히 해결하려고 한 거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남들보다 관찰력이 더 생겼고, 덕분에 진짜의 나를 발견하는 법도 알게 됐습니다.”
-‘진짜의 나’는 오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입니다. 그게 뭘까요.
“젊은 친구들이 ‘료님이 제 롤모델’이라고 종종 메시지를 보냅니다. 저는 절대 제가 롤모델이 돼선 안 된다고 말해요. 나의 롤모델은 철저히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매일의 내가 모여 더 나은 내가 되는 것, ‘다른 누군가의 나’가 아닌 ‘내가 만든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진짜 나로 사는 일입니다.”
진짜의 나. 뉴욕 베이글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결국엔 나만의 ‘런던 베이글’을 만들어 내는 일과 동의어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