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번호가 010-xxxx-0001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골드 번호’였기 때문이다. 외우기 쉽고 누구나 선호하는 숫자, 그리하여 통신 3사가 1년에 한 번 대국민 추첨으로 제공하는 럭키 넘버. 이 번호의 주인 우승운(32)씨는 “새로운 시작을 스스로 독려하고 싶어 3년간 응모한 끝에 당첨됐다”며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마다 사람들마다 신기해하고 덕분에 소통도 원활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회계·세무사 시험을 준비 중인데 이 번호는 끝까지 가져가려고요. 영업이나 업무에 요긴할 것 같아서요.”

그래픽=송윤혜

올해로 골드 번호 추첨 10년째. 이달 7일까지 KT, 이후 LG유플러스·SKT에서도 다시 장이 열린다. 특별한 숫자를 공짜로 얻는 기회. 경쟁은 치열하다. 7777처럼 똑같은 번호가 연속되는 형태의 골드 번호 경쟁률은 지난해 1159대1을 기록했을 정도. 개인 정보 보호를 이유로 이제는 특정 번호를 공개하지 않지만, 2022년 상반기 SKT가 발표한 최고 경쟁률은 5860대1이었고, 해당 번호는 1111이었다. 숫자는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 언어. KT 관계자는 “딸에게 ‘1004’를 선물해 주고 싶어 한다든지 ‘2424’를 얻고 싶어 하는 이삿짐 센터 운영자 등 특수한 수요도 많다”고 했다.

이를테면 한 30대 공인중개사는 올해 개업을 앞두고 미리 골드 번호에 응모해 번호를 받아놨다. 지난해 경쟁률 17대1을 뚫은 그의 번호는 010-xxxx-4989. 부동산을 부지런히 ‘사고팔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명함 건넬 때 ‘사고팔고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쇼~’ 하면 반응도 좋고 제 노력도 은연중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각인 효과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1818’(?)도 인기라고. 010-4444-4444 같은 압도적 존재감은 장난 전화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참고로 현재는 모 대리운전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다. 만취해도 기억할 수 있는 번호, 010-7777-7777 역시 대리운전 전화번호다.

중고 거래 매물로 올라온 자동차 번호판. 뒷번호가 7777이다. 수백만 원에 거래된다. /네이버 카페

한때 이런 골드 번호를 개인적으로 사고파는 과열 양상이 극심했다. 정부가 “유한한 국가 자원인 전기통신번호 매매 행위를 막겠다”며 2016년부터 추첨제를 정례화한 이유다.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관계자 등의 참관 아래 무작위 추첨이 이뤄진다.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당첨된 골드 번호를 판매하는 건 불법. 적발 시 번호 회수 조치가 이뤄진다. 다만 아직 사고팔기 가능한 골드 번호가 있으니, 바로 자동차 번호판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자동차등록령에 따라 지난해 6월 18일 이전 등록된 골드 번호에 한해서만 딱 한 차례 신차에 재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번호판은 ‘간판’이다. 휴대전화 번호와 달리 외부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차량 자체가 재산 과시의 수단이기도 하기에 번호판을 금전운(運)과 결부시키는 경우도 많다. 한 벤츠 딜러는 “기업 회장들의 경우 반복되는 숫자보다 1234 혹은 5678처럼 ‘상승하는 숫자’를 더 선호한다”고 귀띔했다. 번창의 의미, 이 기준에서 최상의 번호는 123사5678일 것이다. 고객이 원하는 숫자를 얻을 때까지 대행업체는 구청 등을 계속 맴돌고, 오늘도 희귀 번호는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수백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

상수학(象數學) 대가인 송나라 학자 소강절은 ‘수즉신(數卽神)’이라는 말을 남겼다. 신의 뜻이 숫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사주명리학 연구자 조용헌 박사는 “숫자마다 음양오행이 있고 사주를 보완해 주는 개념은 존재한다”면서도 “동양철학에서는 언제나 과유불급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화 없이 너무 쏠려 있으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 실제 후기가 이를 증명한다. “골드 번호판이라 눈에 잘 띄는지 위치 추적을 너무 잘 당해요.” “핸드폰 뒷자리 5555 사용 중입니다. 스팸 전화 무지하게 오네요.” 전(前) 주인의 인품도 중요하다. “뒷자리 6666 쓰는데 ‘형님, 출소하셨어요?’ 연락 오고, 각종 해외 도박 사이트 문자로 골머리 앓았네요.” 그러니 수즉인(數卽人)에 더 가까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