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 ‘죽녹원 사운드 워킹 체험’은 ‘죽녹원’ 대숲에서 죽림욕을 즐기며 숲의 소리에 집중해 산책하는 체험이다. 전문 장비인 헤드셋과 지향성 마이크를 통해 미세한 소리도 크고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환경보호운동가이자 작가인 존 뮤어(John Muir)는 ‘우주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야생의 숲을 통하는 길’이라고 했다. 숲이 좋은 계절, 전남 담양은 숲 중에서도 ‘명품 숲’을 품은 곳이다. 담양을 대표하는 ‘죽녹원’ ‘메타세쿼이아 길’ ‘관방제림’ 세 곳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지역 문화 매력 100선(로컬 100)’에 ‘담양 3대 명품 숲’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자연의 소리에 집중해 걷는 ‘사운드 워킹’ 체험부터 메타세쿼이아가 드리운 녹음(綠陰) 아래 황톳길 맨발 걷기까지, 숲이 왕성한 호흡을 하는 계절에 작은 우주와 조우를 기대하며 담양의 숲으로 발걸음했다.

◇담양의 소리를 찾아서…

대숲이 군무를 추면 ‘초록 소음’이 인다. 어떤 때는 ‘쓰르르’ 했다가 또 어떤 때는 휘파람 불 듯 ‘휘이~’ 한다. 속세의 소음과 조금씩 멀어지고, 숲의 품으로 파고들어 갈수록 나무와 새가 속삭이며 말을 걸어온다. 청아한 소리에 누가 되지 않게 발걸음을 맞추다 보면 자연의 일부가 된 듯 차분해지고, 소음에 무뎌 있던 귀의 감각이 서서히 열린다. 담양의 성인산 자락 약 31만㎡ 규모의 대나무 숲 죽녹원의 여름은 어떤 소리를 간직하고 있을까. 가만히 귀를 쫑긋 세우고도 잘 들리지 않는다면 ‘죽녹원 사운드 워킹’ 프로그램을 체험해 볼 일이다.

‘사운드 워킹’ 체험을 할 때 지향성 마이크와 헤드셋을 이용하면 소리가 일반적으로 평소보다 두세 배쯤 크게 들린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소리(sound)와 걷기(walking)의 합성어인 ‘사운드 워킹(sound walking)’은 자연의 소리를 통해 치유받고 생태 감수성을 회복하는 걷기 여행법이다. 쉬운 말로 ‘소리 산책’이라고도 한다. 2022년 제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타트업 ‘더사운드벙커’에서 자연의 소리에 집중한 ‘사운드 투어’ ‘사운드 워킹’이라는 개념을 처음 선보인 뒤 지난해 울산광역시·담양군·부안군 등 지자체가 해당 업체와 관광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올해는 지역과 체험 대상도 확대되는 추세다.

지난해 ‘GKL사회공헌재단’과 함께 죽녹원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운드 워킹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 담양군은 올해 일반인까지 체험 대상을 넓혀 죽녹원과 한재골(준비 중)에서 12월까지 운영한다. ‘죽녹원’ ‘한재골’ ‘죽녹원과 한재골’ 3가지 코스 중 죽녹원 코스 먼저 운영을 시작했다. 담양군 관광과에 따르면 “사운드 워킹 프로그램이 이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해 현재(6월 중순)까지 100여 명 정도가 체험하고 갔다”고 했다. 체험비는 죽녹원 입장료(3000원)에 족욕 체험비(3000원·선택 사항)를 포함해 1인 6000원으로 크게 부담 없는 수준이다. 단, 폭염·폭우·폭설 등 기상 이변을 제외하고 5인 이상 신청(061-380–3157)할 경우 프로그램 체험이 가능하다.

◇죽녹원 ‘사운드 워킹’

죽녹원 사운드 워킹은 총 2.4km의 죽녹원 산책로 중 1.7km 구간의 대나무 숲을 탐방하며 대나무와 교감하는 코스로 짜여 있다. 걷기 시작 전 지향성 마이크와 헤드셋을 ‘장착’한다. 장마로 연일 비가 내리다 잠깐 갠 지난 22일 죽녹원 사운드 워킹의 해설을 맡은 전선희 담양군 문화관광해설사는 “헤드셋을 착용하고 소리를 듣고자 하는 곳에 지향성 마이크를 가까이 가져가면 두세 배 정도로 크게 들을 수 있다”며 “먼저 발걸음 소리부터 들어보라”고 권했다.

안내에 따라 지향성 마이크를 발 쪽으로 향하니 헤드셋을 통해 서걱서걱 흙 밟는 소리, 댓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놀랄 만큼 크고 선명하게 들린다. 전 해설사는 “숲에 사는 생물들에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이보다 크고 위협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사람 발걸음 소리가 느껴지는 곳엔 새끼도, 알도 낳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흙길 발걸음 소리, 소원패를 훑는 소리 등 숲에서 힐링되는 소리를 찾아 녹음해보기도 한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청진기와 비슷한 기능의 진동 마이크를 이용해 대나무의 소리를 들어보는 체험도 ‘죽녹원 사운드 워킹’ 코스 중 하나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주말을 맞아 시끌벅적 단체 관광에 나선 이들을 뒤로하고 비교적 한적한 대숲에 들어서니 비로소 다양한 소리가 ‘순간 포착’된다. 지향성 마이크를 든 팔을 하늘로 뻗으니 산비둘기가 ‘후드득’ 하고 마치 머리 위를 훑고 날아가는 것처럼 들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를 따라가니 이번엔 ‘죽림폭포’가 나타난다. 대나무 숲 여기저기에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자율 감각 쾌감 반응의 줄임말로 뇌에 심리적 안정감이나 쾌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소리)’ 잔치다. 정자에 앉아 빽빽한 대나무 보며 ‘숲 멍’ 하고, 폭포 곁에서 ‘물 멍’ 하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코스인 족욕 체험이 기다린다. 체험이 끝날 무렵 전 해설사는 “음이온이 풍부하고 산소 발생량이 많다는 대숲에서의 사운드 워킹은 특별한 치유의 시간을 선사한다”며 “사운드 워킹 전문 장비가 없더라도 이른 아침 시간대에 인적이 드문 숲으로 가면 그동안 놓쳤던 깊이 있고 아름다운 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자나 의자에 앉아 명상하듯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지향성 마이크를 하늘로 향하니 산비둘기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체험 후엔 ‘운수대통길’을 비롯해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철학자의 길’ ‘선비의 길’ 등 이름만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죽녹원8길’을 헤매며 자유롭게 죽림욕(竹林浴)을 즐기면 된다. 촉촉하게 비 오는 날이라면 미디어아트 전시장에서 대숲 사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미디어아트 영상을 감상하거나 한옥 카페 ‘추월당’에서 비 구경하며 댓잎 차, 댓잎 라테나 댓잎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도 방법이다.

돔형 천장에 봉황이 날아오르는 죽녹원의 미디어아트 전시관.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대나무골 담양에선 “대통밥 먹고 운수대통”이라는 덕담이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마을마다 대숲을, 대숲마다 마을을 품고 있는 대나무골 담양에 왔으니 죽녹원을 나서 죽순 반찬에 ‘대통밥’ 한 그릇 하며 “운수대통 하시라”는 덕담을 나누는 것도 즐거울 일이다.

◇메타세쿼이아 맨발 걷고 관방제림까지

대숲 군락지인 죽녹원이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숲이라면,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의 ‘메타세쿼이아랜드’(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입장료 성인 기준 2000원)는 이국적인 풍광을 간직한 숲이다. 은행나무와 함께 고대부터 존재해 ‘화석 나무’로 알려진 메타세쿼이아가 도열하듯 이어져 오래도록 영화·드라마·광고 촬영지로 사랑받아 온 곳. 2002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숲 대상, 2007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2015년 국가산림문화자산 등재 등 화려한 이력 뒤엔 우여곡절도 있었다.

‘메타세쿼이아랜드’ 산책로를 걷다 만나는 수련. 곳곳에 힐링 풍경이 숨어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은 1972년에 담양군에서 국도 24호선, 군청~금성면 원율삼거리 5km 구간에 5년생 메타세쿼이아 묘목 1300본을 식재하며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담양읍과 연결되는 주요 도로에 식재·관리해 아름다운 가로수 길로 변신했으나 2000년 광주~순창 간 국도 확장 공사 당시 벌목 위기에 처한다. 당시 군민과 지역 단체의 노력으로 우회로가 만들어지며 보전돼 지금에 이르렀다. 자칫 사라질 뻔한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초록의 숲에선 눈이 시원해질 뿐 아니라 발도 즐겁다.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길이 2.1㎞, 너비 2m의 맨발로 걷기 좋은 황톳길은 ‘맨발 걷기 성지’다. 비 내린 후 더욱 폭신해진 황톳길을 곁에 두고 아니 걸을 수는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신발을 벗어 던지는 이도 여럿 보인다. 여름의 메타세쿼이아 숲은 걷는 이들마저 풍경이 된다.

메타세쿼이아 녹음 아래 황톳길은 맨발 걷기 하는 맛을 더한다. 담양의 명품 숲 중 하나로 꼽히는 ‘메타세쿼이아랜드’는 비가 적당히 내린 날에도 운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관방제림’ 부근에서 마주 본 ‘죽녹원’의 봉황루. 담양의 녹음은 지금부터 제철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죽녹원부터 메타세쿼이아 길, 관방제림(官防堤林)에 이르는 길은 담양의 생태 벨트이자 힐링 산책로다. 관방제림은 조선 인조 26년(1648)에 홍수로 해마다 인근의 가옥이 피해를 보자 당시 부사였던 성이성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은 숲길이다. 성이성은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모티프가 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200여 년 후인 철종 5년(1854)에 부사 황종림이 기존 제방을 늘려 쌓고 숲을 다시 정비했다고 전해진다. 과거 관방제엔 나무 700여 그루가 심어졌으나 현재 푸조나무·느티나무·팽나무·개서어나무 등의 아름드리나무 3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관방제림은 조성 당시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어 2004년에는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건너는 재미가 있는 담양천 돌다리는 수량에 따라 물에 잠기기도 한다. 자전거나 전동 바이크를 타고 영산강 자전거 길 따라 관방제림을 둘러보는 것도 색다르다. 대여소는 죽녹원 정문 부근에 있다.

◇‘전우치’ 이야기 있는 ‘연동사’에서 금성산성까지

한국 민간 원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고즈넉한 ‘소쇄원’도 좋지만, 담양에 숨은 듯 자리한 천년 고찰 ‘연동사’로 발걸음해 볼 만하다. 담양읍을 기준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남쪽이면 소쇄원을, 북쪽이면 연동사를 들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된다면 연동사에서 ‘금성산성’까지 한 코스로 이어가 볼 수 있다.

금성리 산성산 자락에 있는 ‘연동사’ 계곡이 비 온 뒤수량이 풍부해져 폭포수로 변신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산성산의 산사인 ‘연동사’ 경내는 현재 공사 중인 곳도 있지만,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동굴법당에서 내려오며 본 장독대와 계곡의 돌다리, 대나무숲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연동사’의 동굴법당엔 ‘전우치전’ 속 전우치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알리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세종실록지리지-담양도호부 편’에 따르면, 연동사는 고려 시대에 세워진 사찰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돼 창건 기록만 남아 있던 절터에서 1대 주지 원행 스님에 이어 선행스님이 수행하며 명맥을 잇고 있다. 연동사 일주문 부근에 닿으면 우렁찬 물소리에 놀란다. 장맛비로 수량이 풍부해져 폭포수가 따로 없다. 경내는 극락보전 공사 등으로 다소 어수선하나 볼거리가 속속 숨어 있다. 암반 위 ‘연동사 지장보살 입상’과 ‘연동사 삼층석탑’이 있는 노천법당에 이어 20m 정도 더 올라가면 동굴법당이 나온다. 동굴법당엔 조선 시대 실존 인물이었던 전우치의 전설과 만날 수 있는 곳. 이곳에서 수행하던 전우치가 곡차(제세팔선주)를 훔쳐먹은 여우를 살려주고 도술을 깨쳤다는 동굴법당에 서면 여우 대신 뻐꾸기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도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시 눈을 감고 귀 기울이면 서서히 들려온다. 보는 것에 익숙해져 놓치고 있던 마음의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