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서울 코엑스에서 국제도서전이 열렸다. 출판 산업은 나날이 불황인데 매년 도서전에는 사람이 미어터지는 현상은 작가인 나에게도 기이한 일이었기에, 올해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 마침 올해 도서전에서는 5년 전 출간한 나의 책 ‘아무튼, 여름’이 개정판으로 첫선을 보일 예정이었기에 더욱 기대됐다. 어디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대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었던 독자들을 실제로 만나고, 책에 사인하고, 대화를 나눌 기회였다.

지난 18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책을 둘러보는 사람들. /뉴시스

도서전 첫날에는 오픈 시간에 앞서 입구에 기나긴 줄이 늘어섰다고 한다. 도서전에서만 판매하는 굿즈 구매를 위한 대기표가 미리 발부됐는데, 대기표를 받기 위한 대기줄 역시 하염없이 이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일찌감치 줄을 섰음에도 원하던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는 후기가 들렸다. 인기 많은 굿즈는 부스 오픈과 동시에 동나, 오후에 방문한 사람들은 텅 빈 부스 앞에서 눈물만 훔쳤다는 소식도 접했다. 도서전에 대한 사람들의 진심은 분명 실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둘째 날, 출판사 부스에서 막간의 사인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평소 사람이 붐비는 장소는 일단 피하고 보는 성향이기에 가기 전부터 긴장이 됐다. 북적이는 인파에 숨이 막혀 덜컥 집에 가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긴장을 풀 겸, 예정된 사인회 시간보다 앞서 도착해 입구에 늘어선 부스부터 구경했다. 여긴 이렇게 부스를 꾸몄네, 여긴 이런 책들을 들고 왔구나, 하나하나 흥미로웠다. 조금씩 전진해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출판사의 부스를 찾아가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이 조금씩 풀렸다. 안부를 주고받고, 덕담을 건네고, 직접 책을 편집한 사람들에게 작품 소개를 듣고 흔쾌히 지갑을 여는 동안 도서전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괜찮은 기분. 절로 든든해지는 마음. 어느새 대부분의 부스를 돌아보며 책을 구경하고, 가방에 담다 보니 사인회에 임할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이후 네 시간 반 동안 부스에 서서 사인을 했다. 나의 책을 들여다보는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호객 행위를 하며 “책 사세요! 사인해 드려요!”를 외쳤다. 나의 외침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오던 얼굴들. 서슴없이 책을 구매하며 사인을 요청하는 손길들. 책으로 가득 찼던 책장이 텅텅 비어가는 풍경을 보는 동안 내 안에 쌓인 외로움과 대상 모를 울분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는 느낌이었다. 땀과 피로로 푹 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꼈다. 나, 그동안 많이 외로웠구나.

혼자 골방에서 꾸역꾸역 글을 쓰고, 안 팔릴 걸 뻔히 알면서도 책을 만드는 일에는 즐거움만 있지 않다. “그래도 너는 좋아하는 일을 하잖아”라는 주변의 반응을 쓴웃음으로 넘긴 지 20년이 돼 간다. 삶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긍지만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좋아서 하는 일이 시류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걸 실감할 때, 그 일이 당장 생계를 위협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정답을 알 수 없어서 그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어서.

하지만 도서전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잔뜩 있었다. 30초에 한 번씩 바뀌는 유튜브 쇼츠 영상보다, 한 장 한 장 내 속도대로 넘기는 책이 더 재미있는 사람. 멋들어진 명품 가방을 장만하기 위해 오픈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하는 작가의 초판 사인본을 손에 넣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사람. 벽에 걸린 아름다운 문장들에 감동하고, 종이의 감촉을 매만지며 두근거리고, 알록달록한 책 표지에 가슴 설레는 사람. 훗날 이곳에 있는 책보다 더 멋진 책을 쓰고,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사람들. 도서전은 시대에 역행하는(!) 책 덕후들이 모여서 좋아하는 것을 깊고 길게 누리는 장소였다. 여기 모인 이들은 평소 ‘나만 책 읽어’라는 외로움을 안고 살다가 1년에 한 번 있는 이 동창회에서 쌓인 설움을 탈탈 털어버리는 사람들 아닐까(자매품: 탈탈 털리는 지갑).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사인회 때 만난 독자 중 한 명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역 도시에 살고 있다는 그는 매년 여름휴가를 도서전으로 온다고 했다. 도서전 5일 치 티켓을 사고, 도서전 근처에 숙소를 잡아 매일 도서전에 출근 도장 아닌 휴가 도장을 찍는다는 그의 말에 내 마음이 다 밝아졌다. 이제는 매년 방문하는 자신을 알아보는 출판사 직원들도 생겼다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런 독자가 있어서 작가는 오늘도 글을 쓴다.

도서전에서 사온 물품들을 책상에 늘어놓으며 생각했다. 내년에도 꼭 가야지. 더 일찍 가서 다양한 책들을 더 많이 만나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1년 동안 꾸역꾸역 일하며 내 안에 외로움과 울분을 가득 채워 둬야 할 것이다. 내년 여름, 비슷한 한을 풀러 오는 사람들과 마주하며 우리만의 동창회를 여는 그날까지 묵묵히, 꾸준히 써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