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예진(43)씨는 요새 벌레에 빠져 있다. “열심히 뽕잎 먹고 커져서 고치를 짓고 오늘 나방이 나왔어요.” 촬영장에서 얻어왔다는 누에, 종일 뽕잎을 갉아먹는 녀석들을 얼마 전 직접 영상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에도 올렸다. 사각사각, 가히 ASMR(심리안정을 유도하는 소리)이라 할 만한 효과음과 함께 꼼지락대는 애벌레. 그 옆에는 웬 하얀 실뭉치가 놓여 있다. 누에고치다. 고치를 열고 나온 나방도 보인다. 대략 한 달이면 일별할 수 있는 한 생명의 생애. “너무 신기하고 뭉클하고 감동적이에요.”
작가 안은영(54)씨도 그 감격을 호소하는 1인. 지인의 선물로 시작된 팔자에 없던 동거는 그러나 그의 가치관까지 뒤흔든 사건이 됐다고. 누에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앞에 쪼그려 앉아 말을 걸고, 심마니처럼 뽕잎을 뜯으러 산을 누비는 ‘누에 집사’가 된 것이다. 그 변화의 기록을 지난해 책(‘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물들’)으로도 펴냈다. “필요한 만큼만 먹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누에 애벌레에게는 탐욕과 경쟁이 없다. 자신의 부피 생장에만 집중한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자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토록 신실하다.”
순둥이들이 주는 치유 효과, 방구석 잠사(蠶事)가 늘고 있는 이유다. 올해의 트렌드 키워드 ‘무해력’의 상징적 미물. 농장에서 판매하는 ‘누에 키우기 키트’로 입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최근 인기가 높아진 파충류 사육을 위한 먹이로 구매했다가 그 잔망스러운 움직임에 중독돼 누에 집사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어느 날 ‘먹방’을 멈추고 흰실을 자아내는 시각 효과는 누에치기의 가장 쏠쏠한 재미. 부산에서 누에를 키우는 한 여성은 “처음에는 도마뱀에게 줄 먹이로 갖고왔는데 고치 짓는 걸 보고는 유튜브에서만 보던 광경이 너무 신기해 아이들과 사진 찍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했다.
누에는 흰색이지만, 원하는 색으로 맞춤형 변신이 가능하다. 뽕잎에 식용색소를 뿌려두면 그걸 먹고 일주일 뒤쯤 보라·파랑·빨강·분홍 등의 ‘컬러 누에’가 되는 것이다. 재밌는 건 애벌레가 이렇게 색을 얻으면 고치의 색깔도 덩달아 변화한다는 점. 자연 염색인 셈이다. 고치 하나에서 풀려나오는 실의 길이는 1000m가 넘는다. 비단실에 술안주 번데기까지 아낌없이 주는 누에. 익충을 넘어 천충(天蟲)으로 불린다. 조선 시대에는 왕비가 키웠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대에 잠사학과(가수 김창완이 이곳 출신)가 있었다. 이런 누에의 복권을 위해 잠원(蠶院)의 고장 서울 서초구 측은 가을에 행사를 열고 누에 3000여 마리를 무료 분양할 계획이다.
다만 편식이 심하다. 뽕잎만 먹는 데다 그마저도 신선하지 않으면 그냥 아사(餓死)를 택할 정도. 지역 커뮤니티마다 “뽕나무 위치 좀 공유해달라”는 누에 집사들의 호소 글이 심심찮게 목격되는 연유다. 아파트 단지 내에 뽕나무가 있다 해도 그 뽕은 위험하다. 조경용 농약이 묻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깨끗한 뽕잎을 그램(g) 단위로 거래하는 새 풍토도 덕분에 생겨났다. “집에 누에가 30마리 정도 있는데 뽕잎을 쉴 틈 없이 먹어요. 농약 안 친 뽕잎 판매하시는 분 계신가요?” 소중한 식구(食口)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