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산수화가·지관·시인들이 공통 소재로 삼는 것이 있다. 산과 물[山水]이다. 화가가 산과 물을 그리면 산수화가 된다. 산수화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왕미(王微)가 말했듯이 “산과 물의 정신을 그려[사산수지신·寫山水之神]”, 그림 속의 정신을 그림을 소장하거나 보는 이들에게 전하는 것[전신·傳神]이다.”
반면에 지관(풍수사)은 땅 기운이 오롯한 곳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인물과 재물의 번창을 꾀하고자 함인데, “山主人水主財(산주인수주재)”라는 문장으로 세속화하고 물신화(物神化)한다. 즉 산은 인물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는 뜻이다. 격언 ‘큰물에서 놀아라!’는 돈과 정보가 많은 곳에 가야 성공한다는 풍수적 관념이다.
시인 가운데 산과 물을 노래하는 이들이 있어 왔다. 섬진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가르치고 사는 김용택 시인도 그중 하나다. 작년에 작고한 시인 신경림의 시원(詩源)은 남한강의 산과 물이었다.
산수화가·풍수사·시인에게 공통점이 또 있다. 산과 물은 그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김용택 시인은 그 기간을 한 세대로 본다. “산도 한 삼십 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 물도 한 삼십 년쯤 바라보아야 물이다.”(‘저산 저물’). 풍수를 소재로 글을 쓴 지 필자도 삼십 년이다. 이제 땅이 좀 보이는 듯하다. 김용택 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경림 시인의 산과 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구체적이다.
1950년대 신경림 시인에게 산과 물은 저만큼 떨어져 있는 “봄날의 따스한 언덕”일 뿐이었다. 초기작 ‘묘비’(1956) 일부다. “쓸쓸히 살다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한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비가 섰다.”(‘묘비’)
1970년대 시인의 ‘목계장터’에 드러난 산과 물은 인간에게 조용히 명령을 내리는 존재였다(목계장터는 남한강변에 매달 4일과 9일에 서던 5일장이었지만, 사라진 지 오래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목계장터’)
20년이 지난 1990년대, 시인은 ‘인간과 산수를 서로 어긋나면서도 의지하는 대대(待對)적 관계’로 파악한다. ‘묘비’를 쓴 지 40년 만의 일이다. “알겠구나, 산수(山水)도/ 사람의 때 묻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이치를”(‘산수도 사람 때 묻어’)
여기서 ‘때’는 오염이나 오물이 아니다. 어린 시절 ‘꼴(풀)’을 벤 경험으로 유추하자면(사실 ‘아동노동’이었다), 각자가 쓰는 낫과 꼴망태가 따로 있다. 낫자루는 주인의 손때로 윤이 번들번들해진다. 낫과 주인이 하나가 되어야 꼴(풀)이 쓱쓱 베어지는 법이다. 익숙하지 않은 낫을 쓰면 손 베이기 십상이다. ‘때’는 사물과 사람을 하나로 만든다.
신경림 시인이 말한 “산수에 사람의 때 묻어”란 자연과 인간의 교감 작용 속에 윤이 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시적(詩的)으로 거주한다”는 독일 시인 횔덜린의 시와 상통한다. 그런데 횔덜린은 위 시 문구 앞에 “많은 업적(공로)이 있음에도”라는 의미의 ‘voll Verdienst’를 달았다. 인간이 땅 위에 거주하면서 논밭을 개간하고, 도시를 만들고, 초고층 건물을 세워가며 세속적 ‘업적(공적)’을 이루어 왔지만, “이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함”이 더 본질적이란 뜻이다. 이때 언급되는 ‘땅’은 무차별적인 땅이 아닌 특별한 장소성을 전제한다. 인간은 땅을 무차별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자기가 태어나 원초적 체험을 경험한 땅은 ‘고향’의 땅이다. 김용택·신경림 시인 모두 고향 땅에 “시적으로 거주”하고자 하였다. 시인의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 4월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이다. “흙과 물과 산, 이 모든 것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우정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지니는 특정 장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저마다의 고향 땅을 오롯이 지켜야 할 이유이다. 문제는 그런 땅들이 물리적으로 파괴되고 오염되는 것 말고도, 고장마다 ‘텃세’라는 악령의 배회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신경림 시인도 고향 마을에 가지 않았다. 한참 떨어진 ‘목계장터’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고향 마을을 바라보곤 하였다. 죽어서야 비로소 고향(충주시 노은면 상입장리)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시인과 풍수 그리고 화가가 더욱 절실한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