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뿜어내는 활력과 긴장, 워싱턴이 지닌 정치적 위상과는 다른 매력의 도시 필라델피아. 이곳에 가면 미국의 역사와 전통이 무엇인지를 체감하게 된다. 미국 건국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 중요 인물의 흔적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인디펜던스홀, 옛 국회의사당, 미국 최초의 은행 등 초기 연방정부의 수많은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가 1926년 그린 앨버트 반스의 초상화. /반스 파운데이션, ©2025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SIAE, Rome

그리고 미술관이 있다. 지난달 개인적으로 미국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일정을 계획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반스 파운데이션(Barnes Foundation)’이었다. 필라델피아 남자 앨버트 반스(Barnes·1872~1951)가 평생 모은 걸작으로 가득한 보물 창고. 당초 목적지에서 비행기로 편도 2시간 거리였지만, 충분히 투자할 만한 시간일 것이었다. 과연 명불허전.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20세기 야수파 창시자 앙리 마티스의 벽화 ‘춤’(1932~33)과 대면했을 때, 마티스가 “미국에서 제대로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라고 말한 이유를 체감할 수 있었다.

◇반스와 마티스

반스 파운데이션 미술관 중앙홀, 앙리 마티스의 벽화 ‘춤’이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Michael Moran/OTTO

반스는 의사였다. 그리고 억만장자였다. 훗날 컬렉터로 변신해 1925년 필라델피아 근교 메리온에 이 미술관을 설립(2012년 필라델피아 시내로 이전)했는데, 벽화 ‘춤’은 그가 지닌 미술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증거다. 1930년, 반스는 미술관 중앙홀에 있는 아치 3개를 마티스의 그림으로 채우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수차례 마티스에게 편지를 썼다. 이때 반스는 이미 마티스 작품 25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더 웅대하고 멋진 뭔가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당 5m 높이의 아치, 이 거대한 공간을 보기 위해 마티스는 처음 메리온을 찾아왔다. 큰 종이를 오려가며 아치를 채울 이미지와 색채를 구상했다. 다양한 포즈의 여성 누드, 파랑·분홍·검정·회색의 색면으로 율동하는, 마티스 컬렉션 중 유일하게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으로 제작된 그림. 사실 이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제작 착수 1년 뒤인 1933년 완성됐다. 마티스가 처음에 공간 실측을 잘못해 첫 번째 작품을 쓸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마티스와 반스 사이에는 웃지 못할 일화가 하나 있다고 도슨트가 살짝 귀띔했다. 작업 실패로 잔뜩 위축돼 심장에 통증을 느낀 마티스에게 의사 출신인 반스가 약 대신 ‘위스키’를 권했다는 것. 마티스는 실제로 1954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심장병이 반스 탓에 악화됐다고 믿었다고 한다. 다만 작품을 완성한 후, 자신의 그림을 향해 “보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찬란함”이라 선언할 만큼 만족스러워했다고.

◇흙수저에서 갑부로

초창기 반스 컬렉션에 포함된 반 고흐 ‘우체부’(1889). /반스 파운데이션

반스는 필라델피아에서 푸줏간을 운영하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북전쟁 당시 오른팔을 잃은 상이군인이기도 했다. 자칫 불우할 수도 있었던 유년 시절을 그는 모친의 사랑으로 극복해 나갔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신자 캠프에 참여하곤 했다. 캠프에서 반스는 흑인들의 예배를 보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 인종을 초월한 평등 의식에 눈을 떴다.

명석했던 그는 1889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대에 입학했다. 권투·야구 선수로 활동하며 학비를 벌었다. 결국 의사가 됐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하지만 인턴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적성이 의사와는 거리가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화학 분야로 관심을 돌렸다. 독일 유학 당시 만난 화학자 헤르만 힐레와 함께 눈·코·귀·목의 염증 치료 및 임질로 인한 신생아의 실명을 막는 아르지롤(Argyrol)을 개발했다. 1902년 제약회사 ‘반스 앤드 힐레’를 세웠고, 1908년에는 ‘A.C. 반스 컴퍼니’를 설립했다.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불과 4개월 전 반스는 회사를 600만달러에 매각했다. 갑부가 된 것이다.

◇컬렉션의 시작

르누아르 ‘베르나발에서의 홍합 채취’(1879). 반스는 르누아르 작품만 179점 보유했는데, 이 그림은 1942년 가장 마지막으로 구입한 것이다./반스 파운데이션

그러나 이미 그의 수집 활동은 1910년대부터 시작됐다. 친구 덕이었다. 고교 동창, 훗날 ‘미국의 르누아르’라는 명성까지 얻은 화가 윌리엄 제임스 글래컨스(1870~1938). 글래컨스를 통해 미술을 처음 접한 반스는 1910년 그의 작품과 그의 소장품 몇 점을 사들였고, 후인 1912년 2만달러를 건네며 “파리에서 좋은 작품을 몇 점 사달라”고 부탁했다. 안목이 높았던 글래컨스는 고흐·세잔·피사로 등 거장의 걸작을 구해 반스에게 전달했다. 반스는 크게 기뻐했고 그해 가을 직접 파리로 건너가 작품을 더 구입했다.

작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미국인 남매 레오 스타인·거트루드 스타인의 파리 살롱에서 반스는 유럽의 유명 작가들을 직접 만났다. 마티스·피카소 등과 진지하게 교류했고, 모더니즘 미술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반스는 거트루드를 통해 마티스의 1906년작 ‘삶의 기쁨’을 구매했다. 마티스의 기량이 절정에 오른 작품. 비틀어지고 왜곡된 인체 표현을 눈여겨본 피카소가 바로 이듬해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것 아니냐는 설이 있을 정도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다. 반스 컬렉션의 대표작답게 반스의 지시대로 언제나 같은 자리에 놓여 관람객을 맞이한다.

◇벽의 조화

이곳만의 고유한 전시 스타일을 드러내는 미술관 내부. 작품 명제표도 없고, 그림 옆에는 각종 기물이 함께 걸려있다. /반스 파운데이션

반스 파운데이션 규모는 입이 떡 벌어진다. 일단 프랑스 인상파 거장 르누아르의 그림만 세계 최다인 181점을 보유하고 있다. 폴 세잔 69점, 마티스 59점, 피카소 46점, 모딜리아니 16점, 앙리 루소 18점, 수틴 21점, 드가 11점, 키리코 11점, 고흐 7점, 쇠라 6점 등 회화 작품 900여 점. 여기에 아프리카 공예품, 아즈텍 도자기, 골동품 가구 등을 포함하면 4000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그의 컬렉션 가치를 250억 달러(약 34조원)로 추산했다.

폴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1890~1892). 반스 컬렉션에는 세잔의 작품 69점이 포함돼 있다. /반스 파운데이션

그 백미로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1890~1892)을 꼽고 싶다. 세잔은 이 주제로 다섯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중 한 점을 2011년 카타르 왕족이 경매에서 2억5900만달러(약 3550억원)에 사들여 미술 시장을 요동치게 했다. 조르주 쇠라의 ‘모델들’(1886~1888)도 주요 소장품이다. 이 작품은 쇠라의 또 다른 걸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1886)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당시 비평가들이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인물을 리얼하게 묘사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자 쇠라는 그랑드자트 그림이 걸려 있는 배경을 설정하고 그 앞에 여성 3명을 사실적으로 옮긴 이 그림을 완성했다. 사이즈도 249x300㎝로 대형이다. 2023년 쇠라의 작은 그림 ‘모델’(50x39㎝)이 1억4940만달러(약 2000억원)에 낙찰됐다. 단순 비교하기 어렵지만 이보다 10배 정도 큰 ‘모델들’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어렵다.

조르주 쇠라 ‘모델들’(1886~1888). /반스 파운데이션

미술관에는 이런 귀한 그림이 경첩·자물쇠, 심지어 주전자나 주걱 등 온갖 기물(器物)과 함께 진열돼 있다. 뭔가를 창조하고 혁신하려는 인간의 충동이 미학적 형태를 창출한다고 생각했던 반스는 이런 생활용품을 사 모았고, 그림과 서로 어우러지는 시각적 경험을 관람객에게 제공하고자 했다. 다만 전시장에는 어떠한 ‘명제표’도 없다. 작품 감상을 방해하거나 선입견을 심어 주는 어떤 정보도 허용하지 않고 순수한 미적 체험만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이런 전시 방식을 반스는 ‘벽의 조화’(Wall Ensemble)라고 명명했다. 예술 작품을 온전히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제안이다.

◇사진 촬영 금지

생전의 앨버트 반스. 교통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반스 파운데이션

반스는 수많은 소장품을 제왕처럼 관리하고자 했다. 괴팍할 정도의 원칙을 고수했다. 자신의 컬렉션이 절대 메리온을 떠나서는 안 되며, 그가 직접 배치한 원래 상태대로 전시돼야 하고, 판매와 대여 및 단일 작품 전시도 불가하며, 컬러 사진 촬영도 금지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오죽하면 그의 사후 42년이 지난 1993년에서야 반스 컬렉션은 ‘세잔에서 마티스까지’라는 전시를 통해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처음으로 컬러 도판이 제작될 수 있었다.

이런 완고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반스는 1922년 ‘반스 파운데이션’을 설립하면서 그것을 미술관이 아닌 교육기관으로 정의했다. 자신의 안목으로 구축된 컬렉션이 노동자, 흑인, 빈민을 위한 예술 교육의 소재로 활용되길 원했다. 그 배경에는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존 듀이(1859~1952)와의 평생에 걸친 교류가 영향을 줬다. 반스는 예술이 단순한 오락 이상의 것이라고 믿었으며 예술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는 본질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예술과의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유언은 하나가 더 있다. 정치나 문화 사업에 휘둘리지 말고 컬렉션을 오직 교육적 목적으로만 사용할 것.

필자는 미술계에서 40년 가까이 일하며 수많은 컬렉터를 만났다. 컬렉션의 90%가 위작으로 채워져 있어 경악을 금치 못한 사례도 있고, 특정 장르 혹은 영역에 집중해 독창적인 세계를 이룬 경우도 목격했다. 컬렉션은 돈과 정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확실한 목표 의식, 자신의 취향과 안목에 대한 신뢰, 예술에 대한 정직한 열정이 있을 때 충실한 실체를 지니게 된다. 반스 컬렉션에서 다시금 느낀 것이다.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