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키보다 한참 큰 2m 10cm 길이의 썰매, 식량과 장비가 담긴 27kg의 박스 세 개가 한 달 먼저 한국을 떠났다. 나보다 앞서 항공 화물로 푼타아레나스에 짐을 보낸 상태였다. 푼타는 남극으로 가는 첫 관문 기지인 칠레 최남단의 중심 도시다. 12시간 시차의 지구 반대편이라 12월의 한국은 겨울이고 푼타는 한여름이다. 여기서 남극 대륙을 향한 비행이 시작된다.
출국 한 달 전 썰매를 먼저 보내던 시기에 사람들은 “컨디션 어때?”라고 물어 왔다. 나는 “내일 당장 떠나도 돼!”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난 자신 있어! 그러니 걱정 마시라’는 의미였다. 인생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큰 모험의 출발 앞에 가장 힘든 70일의 여정이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2년 전 남극점의 경험을 발판으로 디테일을 더 고민하고 실수를 줄이는 연습을 했다. 과정이 벅차게 느껴질 때마다 차라리 썰매를 끌고 걷는 게 훨씬 낫겠다 싶었다. 하루빨리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체력을 위한 훈련만이 문제가 아니다. 각종 처리할 서류들이 작은 회사라도 차린 것만 같았다. 식량의 통관과 새로운 장비들의 사용법 등 모든 걸 알아야 했다. 남극에서 혼자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니 도움을 부탁할 수도 없다.
목숨과 위험을 담보로 하는 야생의 도전은 치밀하게 계산된 모험만 존재해야 한다. 10g의 무게에도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한결같은 단 하나 불변의 법칙 ‘무사 귀환’의 목표가 있다. 이 원칙만큼은 히말라야 등반과 목표 지점이 같았다. 특히 이번은 3단계 프로젝트의 세 번째로, 안전을 기본으로 건강하게 꼭 결과를 가져오겠다는 강렬한 다짐을 했다. 2년 전 남극점을 향할 땐 출발하는 ‘첫날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면, 이번은 ‘길의 끝에 서게 될 마지막 모습’만을 상상하며 준비했다. 10여 년을 이것에 맞춰 삶을 설계했다. 이제 걷기만 하면 된다.
2024년 10월 26일, 드디어 비행기를 타는 날이 왔다. 전날 오후에 헬스장에서 마무리로 3대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청소를 시작했다. 걸레를 빨아 널고 쓰레기통까지 비우니 새벽 5시다. 100일 후 돌아와 나를 맞이할 빈방의 모습이 단정하길 바랐다. 누웠지만 잠이 쉽게 들지 않아 결국 밤을 홀딱 새웠다. 분명 남극점까지 내가 해냈던 길인데, 얼음 사막 위를 걷는 상상만으로도 통증에 대한 고통의 기억이 나를 흔들어 놓는다. ‘그래도 잘 견뎠잖아! 하던 대로 하면 돼.’
집 근처에 사는 후배 송희가 아침 8시에 픽업을 왔다. “오늘 언니를 사고 없이 공항까지 배웅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운전대를 잡은 손과 연결된 송희의 팔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어깨가 직각으로 경직되어 보였다. 차에서 송희가 싸 온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공항에 도착했다. 귀국 환영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 지인이 토요일 아침 일찍 배웅을 나왔다. 회사, 친구, 산악부, 가족…. 출국 수속을 기다리며 나는 내내 크게 웃고 떠들었다. 준비된 자의 여유로, 보내는 마음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동해에서 첫 새벽 기차를 타고 온 25년 지기인 하나뿐인 산악부 동기가 나의 마지막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내 반사적으로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볼을 양손으로 붙잡고 흔들었다. 친구의 검은 눈동자 깊숙이 애써 숨긴 염려가 촉촉하게 아른거렸다. 이 녀석의 눈빛 때문에 단속하던 마음이 무장해제되어 하마터면 울 뻔했다. 우린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네 마음의 말들을 다 이해해.’ 튀어 오를 것만 같은 마음의 묵직함을 씩씩하게 꾹 누르고 고개를 끄덕여 서로 웃어 보였다.
보내는 이들이 내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것만 같아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왼팔을 귀 옆까지 바짝 붙여 치켜든 손을 좌우로 서너 번 크게 흔들었다. 표정 없는 뒷모습의 손짓에서 ‘용기와 믿음’이 전달되길 바랐다.
깊은 애정과 여러 응원의 힘으로 여기까지 길이 이어졌다. 지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당신들의 마음에 기대어 한 걸음씩 용기 내 볼 테다. 절대 혼자 걷는 게 아니니 걱정 마시라! 내 인생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이토록 큰 용기와 에너지를 쏟아 낼 기회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계획한 일정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이번의 원정이 너무 소중하고 특별하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