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인치 크기 스크린에서 게임 시리즈 ‘동방 프로젝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왔다. 리허설을 보러 온 사람들은 경광봉을 흔들며 “삼요정 야! 세이 야! 세이 야!”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12층. 이달 새로 문을 여는 서브컬처 복합 문화 공간 ‘스페이스 일러스타’에서 공연장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가상 아이돌 공연과 팬미팅, 코스튬 플레이 등이 가능한 장소. 작년 2월 유통 업계 최초로 ‘버추얼 아이돌 콘서트’를 연 현대백화점은 공연장과 굿즈 전문점, 카페 등을 품은 서브컬처 전문관을 국내 최초로 신촌점에 개점한다.
소수 취향의 전유물로 취급받던 애니메이션과 코스튬 플레이 문화가 주류 문화로 편입되고 있다. 애니메이션·게임 마니아들을 ‘오타쿠’ ‘덕후’로 부르며 비주류 취급하던 덕질 문화(특정 취향을 파고드는 것)가 잘파세대(1990년대 중후반~2010년대 초중반 출생) 사이에서는 취향에 집중하는 디깅(Digging)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이다. 일산 킨텍스나 부천 등에서 열리던 코스튬 플레이 축제 공간이 서울 한복판 백화점에 들어서고, 가상 아이돌 콘서트 티켓은 10분 만에 매진된다.
◇뉴진스 이긴 가상 아이돌
현대백화점 서브컬처 전문관에는 공연장과 함께 게임, 인기 서브컬처 굿즈(기념품)를 판매하는 상점,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은 메뉴를 판매하는 카페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연세대·홍익대·이화여대 등이 가깝고 젊음의 거리가 있는 신촌에 번듯한 ‘덕후 전용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앞서 이곳은 2019년부터 서점으로 운영돼 온 공간.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젊은 고객의 문화 소비 트렌드가 책 같은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변화한 데다 애니메이션과 가상 아이돌, 게임 팬들의 문화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해 전용관을 연다”고 말했다.
가상 아이돌은 요즘 K팝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가상 걸그룹인 ‘이세계 아이돌’은 이달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1만6000석을 갖춘 이곳에서 공연한 K팝 걸그룹은 2023년 블랙핑크 이후 이세계 아이돌이 두 번째다.
2023년 데뷔한 5인조 가상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는 음반 판매량 100만장 돌파, 지상파 음악 방송 1위를 기록한 실력파 그룹이다. 실제 사람으로 구성된 아이돌과 팬덤으로 경쟁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작년 7월 데뷔 494일 만에 음악 재생 사이트 멜론에서 누적 스트리밍 10억회를 돌파해 뉴진스가 보유한 최단 기록을 갈아치웠다. 올해 2월 발매한 세 번째 미니앨범 타이틀곡 ‘대시’는 가상 아이돌 최초로 미국 빌보드 글로벌 200 차트에 진입하며 해외 팬덤을 이끌고 있다. 다음 달에는 일본에서 정식 데뷔한다.
게임 캐릭터들도 모니터 밖으로 뛰쳐나온다. 편의점 GS25가 판타지 게임 ‘승리의 여신: 니케’ 캐릭터를 활용해 지난달 선보인 도시락·삼각김밥 등은 출시 첫날부터 자체 앱에서 인기 검색어 1위를 기록하며 350만개나 판매됐다. 지난 2월 이 게임에 나오는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선보인 ‘멜로디스 오브 빅토리’ 콘서트에는 4400명이 몰렸고, 오는 24일 열리는 넥슨의 ‘블루 아카이브’ 게임 음악 콘서트(서울 공연)는 예매 시작 3분 만에 전석이 매진됐다.
◇당당히 소비하는 개별 취향
음지에 있던 과거의 덕질 문화와 달리 요즘 세대의 디깅 문화는 양지에서 활발히 소비된다. 30대 회사원 김윤희씨는 “티켓 값만 10만원 정도 하는 가상 아이돌 콘서트에 종종 가서 스트레스를 푼다”며 “예전엔 오타쿠라는 놀림도 받았지만 아이돌 그룹이나 뮤지컬을 좋아하는 동료들처럼 하나의 취향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 서브 컬처 시장은 5000억원 규모로 덩치를 키웠다. 글로벌 시장까지 넓히면 성장세는 더욱 가파르다. 마켓 리서치 인텔렉트에 따르면, 애니메이션·만화·게임·소설을 포함한 글로벌 서브컬처 시장 규모는 2023년 209억달러(29조6612억원)에서 2031년 485억달러(68조8312억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인성 논란이나 과거 부정 논란에서 자유롭고, 체력 이슈가 없어 팬들과 소통할 시간이 많다는 점을 가상 아이돌·게임 캐릭터 팬덤의 이유로 꼽는다. 팬들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캐릭터 설정을 바꾸기 쉬운 것도 장점.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모바일·유튜브·TV 등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자기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셈”이라면서 “현재 가상 아이돌·캐릭터들은 결국 사람이 콘텐츠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각종 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