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2~21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부활절페스티벌 일환으로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도심에서 야외 공연을 펼치고 있다. 베를린필은 10일간 '나비 부인'과 베토벤 교향곡 '합창' 등 오페라와 관현악 연주를 8차례 가졌다./김기철 기자

중년 이상 한국인은 44년 전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이 ‘세울’이라 외치던 이 도시를 기억할 것이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곳을 찾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은 벌떡 일어나 얼싸안고 ‘만세’까지 불렀다.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됐다. 불가능해 보이던 올림픽 유치, 그것도 강력한 경쟁 후보인 일본 나고야를 52대27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따낸 기적적 성과였다.

◇‘목련꽃 천지’ 바덴바덴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열차(ICE)로 1시간 30분 만에 독일 남서부의 소도시 바덴바덴에 도착했다. 4월의 바덴바덴은 희고 붉은 목련꽃 천지였다. 카지노와 콘서트홀을 갖춘 문화센터 쿠르하우스와 독일 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1세가 즐겨 찾던 온천 휴양 시설 트링크할레,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프리더 부르다 미술관.... 리히텐탈러 알레 공원이 품은 문화 명소 곳곳에서 목련꽃이 눈부시게 빛났다. 도심을 관통하는 작은 강(개울에 가깝다)을 따라 띠처럼 조성된 2.3㎞의 공원이다.

바덴바덴 문화예술의 중심인 쿠르하우스. 카지노와 공연장을 함께 수용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카지노에서 거액을 탕진하고 소설 '노름꾼'을 썼다. 4월 중순 쿠르하우스 앞 풀밭엔 튤립꽃이 만개했다./김기철기자

◇도스토옙스키 ‘노름꾼’ 산실

쿠르하우스는 44년 전 서울 올림픽이 결정된 IOC 총회가 열린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지노’(독일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63년 9월 이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거금을 탕진한 뒤 빚에 쪼들렸다. 속기사를 고용해 구술로 27일 만에 써낸 중편소설이 ‘노름꾼’이다. 도박에 빠진 노름꾼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이면을 파헤친 명작의 산실(産室)이 이 카지노인 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노름꾼’을 받아 쓴 속기사와 결혼까지 했으니 이 도시가 악연으로만 남진 않았을 것 같다. 도박에 맛 들인 도스토옙스키는 바덴바덴은 물론 함부르크, 비스바덴 카지노를 전전하며 계속 돈을 날렸다. 룰렛을 주로 했다고 한다.

작년 8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도스토옙스키 원작으로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가 쓴 오페라 ‘노름꾼’을 올렸다. 10대 남짓한 대형 룰렛이 무대에 진열됐다가 공중으로 떠올라 반짝이는 샹들리에로 변신했다. 샹들리에가 입구부터 맞이하는 쿠르하우스 카지노는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실내 투어에 참가하면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4차례 투어를 진행한다.

1998년 개관한 바덴바덴 페스티벌 극장. 옛날 기차역을 개조해 극장 출입구로 활용했다. 조성진은 공연 포스터에 간판으로 등장할 만큼, 이곳에서 스타 대접을 받는다./김기철기자

◇베를린필이 차려낸 부활절 페스티벌

온천과 카지노의 도시 바덴바덴은 2000년대 들어 예술 도시로 발돋움했다. 바덴바덴 페스티벌극장과 프리더 부르다 미술관이 중심이다. 100년 전 기차역을 개조한 페스티벌 극장은 1998년 2500석 오페라극장으로 변신했다. 세월의 흔적이 밴 역사(驛舍) 출입구가 극장 정문이다. 건축비만 6000만유로(약 942억원)를 들였다.

이번 바덴바덴행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차린 부활절 페스티벌(4월12~21일) 때문이었다. 2013년부터 페스티벌을 책임진 베를린필은 상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오페라 ‘나비 부인’(총 3회)을 대표 메뉴로 준비했다. ‘아이돌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와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차기 음악감독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을 연이어 다른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협연까지 포함됐으니 최고의 시간이었다.

부활절 페스티벌 메인 작품인 푸치니 오페라 '나비 부인'. 베를린필을 지휘한 페트렌코는 정확하고 중량감있는 사운드를 빚어내며 청중을 압도했다. 주인공 초초상을 연기한 이탈리아 소프라노 엘레오노라 부라토/c Monika Rittershaus
부활절 축제 메인 프로그램인 오페라 '나비 부인'. 화려한 색채와 감각적인 무대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c Monika Rittershaus

◇페트렌코 지휘 돋보인 오페라 ‘나비 부인’

‘나비 부인’은 초초상을 맡은 이탈리아 소프라노 엘레오노라 부라토가 발군이었다. 3막 내내 거의 무대를 떠나지 않고 노래하는 역할이라 부담이 컸지만, 뛰어난 가창력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1등 공신은 페트렌코의 베를린 필이었다. 바그너를 연주하듯, 생동감 넘치고 장중한 관현악으로 3시간 내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청중을 휘어잡았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시즌 개막 공연을 세 번이나 해낸 다비데 리베르모어의 연출과 무대도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야쿠프 흐루샤가 지휘한 베를린 필과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한 조성진. 그는 이곳에서도 스타였다./Monika Rittershaus

◇바덴바덴의 스타 조성진

베를린 필 상주 음악가 조성진은 이곳에서도 스타였다. 극장 앞에 붙은 공연 포스터엔 지휘자 흐루샤가 아니라 조성진이 간판으로 걸렸다. 지난 3월 15~16일 베를린에서 가진 정기 연주회 프로그램 그대로였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에 이어 앙코르 연주까지 같았다. 조성진은 음악의 구도자(求道者)처럼 느긋하면서도 신실하게 건반을 두들겼다.

오슬로 필하모닉과 파리 오케스트라에 이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시카고 심포니까지 지휘하는 메켈레는 아직(!) 서른 전이다. 노르웨이 피아니스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한 데 이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연주했다. 베를린 필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레퍼토리로 정면 승부한 셈이다. 2년 전 베를린 필 데뷔 때보다 더 본격적이고 진지한 연주였다. 6월 초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이 악단과 선보일 정기 연주 프로그램을 미리 맞춰보는 기회다.

베를린 필을 지휘,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을 연주한 20대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Monika Rittershaus

단원들은 중간 휴식 때 밖으로 나와 자연스레 청중과 어울렸다. 오보에 수석 알브레히트 마이어나 클라리넷 수석 벤젤 푹스 같은 스타 단원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베를린 필은 오케스트라 콘서트만 5회 가졌고, 낮 시간엔 수석 단원을 중심으로 한 실내악 연주가 15회 열렸다.

◇황금빛 금관 주자들의 향연

실내악 공연은 주로 쿠르하우스 바인브렌너잘에서 열렸다. 트럼펫, 트롬본, 튜바 등 금관 주자 10여 명이 펼친 브라스 콘서트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호연(好演)이었다. 연주가 쉽지 않은 금관을 목관 다루듯 경쾌하게 연주했다. 바흐부터 쇼스타코비치, 탱고부터 재즈까지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을 끓어오르게 했다.

베를린 필 첫 여성 호른 수석인 사라 윌리스는 “베를린 필의 이곳 부활절 페스티벌은 올해가 마지막이다. 하지만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내년 부활절 페스티벌(3월 28일~4월 6일)은 요아나 말비츠가 이끄는 말러 챔버오케스트라가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을 개막작으로 올리고, 메켈레가 이끄는 로열 콘세르트허바우가 말러 교향곡 5번과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연주한다.

출판인이자 현대 미술품 수집가 프리더 부르다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미술관. 프리츠커상 수상자이자 '백색의 건축가' 로 알려진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했다./N. Kazakov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설계한 미술관

바덴바덴은 2004년 프리더 부르다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날개를 달았다. 독일의 유명 출판업자이자 현대 미술 수집가로 이름난 프리더 부르다(1936~2019)가 설립했다. ‘건축계 노벨상’으로 알려진 프리츠커상(賞)을 받은 미국인 리처드 마이어(91)가 설계했다. ‘백색의 건축가’란 명성답게 리히텐탈러 알레 공원 한편에 들어선 미술관은 모던하면서도 간결한 백색 외관이 도드라졌다. 실내는 에스컬레이터 대신 낮은 경사로를 통해 위층으로 오르내리게 설계했다. 경사로를 오르며 창밖의 짙은 녹음(綠陰)을 바라보면 전시 관람의 피로가 한결 덜해진다.

일본 팝아트 작가 요시토모 나라 기획전. 독일에서 열린 최초의 본격적 대규모 회고전이다. /N. Kazakov

◇전후 유년기의 기억 풀어낸 요시토모 나라

부르다 미술관은 일본 팝아트 작가 요시모토 나라(66)의 대규모 회고전을 작년 11월부터 열었다. 4월 27일 폐막한 이 전시는 개발 연대에 성장한 작가 요시모토 나라의 개인적 체험이 강하게 반영됐다. 1980년대 후반 독일에 유학 와 12년간 지내다 2000년 귀국한 작가는 회화를 중심으로 드로잉,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작품을 출품했다. 눈물을 흘리거나 찡그리고 우울한 소녀의 얼굴이 대부분이다.

미국 대중문화의 압도적 영향 아래 맞벌이 부모 슬하에서 외롭게 성장한 세대의 불안, 우울, 고독, 분노가 담겨 있다. 박스지, 연습장, 포스터, 전단, 봉투에 그린 소녀의 감정을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담았다. 반전, 반핵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도 있어 무게를 더한다.

2층에 전시된 대형 조각 ‘숲의 소녀’(Miss Forest)는 리움미술관 소장품이라 눈길이 갔다. 5월 17일부터 미국 화가 겸 조각가, 사진가 리처드 파우제트-다트(1916~1992)전과 독일 인상파 화가 막스 리버만(1847~1935) 기획전이 차례로 열린다.

◇‘슈바르츠발트’ 트레킹 출발지

바덴바덴은 ‘슈바르츠발트’ 여행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숲이 무성해 검은빛으로 보인다고 해서 ‘흑림(黑林)’으로 알려진 ‘산림 대국’ 독일의 자랑거리다. 남북 160㎞, 동서 16~40㎞에 이르는 산지다. 여름이면 온천과 삼림욕, 트레킹을 즐기려는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한국 산림 녹화 사업의 모델로 자주 거론된 곳이다. 렌터카를 빌려 숲속을 달리면 가슴속 묵은 응어리까지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듯하다.

바덴바덴 도심은 어디든 걸어서 15분 안팎이면 도착할 만큼 아기자기하다. 낮에는 온천욕과 사우나를 하며 긴장을 풀고, 거리를 산책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도 뭐랄 사람 아무도 없다. 저녁에는 정장을 차려입고 콘서트홀에 다녀온 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식사를 즐기면 된다. 이곳에선 서두를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