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에 남은 역사를 지우고 가짜 역사로 덮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전주 이씨 왕실 자존심’이라는 고종 둘째아들, 의친왕 이강에 관한 이야기다. 첫째, 이강은 경남 거창에서 독립운동가 정태균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다가 들켜서 서울로 압송됐다. 둘째, 이강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셋째, 이강은 김재식이라는 전직 고위 관료와 함께 비밀리에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었다.

사실이 아니다. 남의 공적을 가로채 이강을 독립운동가로 만들려는 가짜 주장이다. 이들은 각종 강연과 학술대회를 통해 가짜 역사를 사실로 조작하고 있고, 여러 뉴스와 블로그에서 이 가짜 역사가 진실인 양 인용되고 있다. 차근차근 보자. 이 글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국립연구기관 소장 학자 도움을 크게 받았다.

의친왕 이강. 독립운동을 도모해 전주 이씨 왕실 자존심을 지켰다고 후손들은 주장한다. 이강은 거창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했다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독립기념관

1909년 의친왕이 거창에서 독립운동?

2024년 6월 세종시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의친왕 후손인 이준은 이렇게 주장했다. ‘1909년 10월 의친왕이 경남 거창군 정온고택의 정태균을 방문해 40일간 머무르면서 의병을 양성하다가 일본군에 발각돼 서울로 강제 호송됐다.’(이준 황손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 사동궁과 의친왕의 항일운동’,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세종시, 2024)

그럴까? 의친왕 이강이 거창에 40일 동안 머물렀다는 1909년으로 가보자.

1909년 의친왕은 서울을 떠난 적 없다.

의친왕 이강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와 의전, 취재와 보도 대상이다. 따라서 의친왕이 1909년 10월 거창을 방문해 한 달 넘게 머물렀다면 기록이 있어야 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운영하는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는 1883년부터 1966년까지 국내에서 발행된 모든 신문 기사를 모아 놓았다. 의친왕 이강이 거창에 갔다는 1909년 1년 동안 보도된 기사를 전수 조사했다. 다음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이강공 전하’ ‘의왕’ ‘의친왕’에 관한 기사들이다.

1909년 2월 5일 서북 순행 동행, 3월 5일 장빈 묘 성묘 같은 기사가 보이고 이어 고종을 알현한 기사가 나온다. 기마 장교들과 동대문 밖에서 승마를 했다는 기사도 4월에 ‘황성신문’에 실렸다. 5월에는 의친왕이 나들이를 했다는 사실도 보도됐다. 이후 연말까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보자: 6월 20일 순종 문안. 6월 22일 누에 따기 예식 참가. 6월 23일 통감부 방문. 7월 5일 황제 경작 시범 행사 참가. 7월 27일 동대문 밖 흥천사에 놀러 가서 기생들 가무를 보고 즐기고 8월 20일 기생과 첩들 동행 나들이. 8월 22일과 9월 9일 고종 알현. 9월 22일 동대문 밖 음벽정, 10월 3일 동소문 밖 신흥사 나들이. 10월 7일 완평군 상가 조문, 14일 음벽정 단풍놀이. 10월 28일 이토 히로부미 문상<아래 사진>. 11월 20일 안상호진찰소 검진. 11월 26일 순종 알현. 11월 30일 고종 알현. 12월 6일 다시 순종 알현. 12월 22일 고종 알현. 12월 27일 왕비 대동 고종 알현.

의친왕이 거창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는 1909년 10월 의친왕은 통감부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문상했다.(‘황성신문’) /국립중앙도서관

거창에 내려가 군사 훈련을 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기사에서 보듯, 이강은 1909년 1년 내내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다. 이강 후손들은 “소위 기록들은 총독부 자료거나, 관보, 일제 관변 신문 기사 등 의도적으로 오염된 자료들만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신뢰할 것인가, ‘문중 구술사’를 믿을 것인가. 가짜 역사임을 알려주는 사료는 또 있다.

1909년 ‘독립운동가’ 정태균은 없었다

이강과 함께 의병을 양성했다는 정태균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의병 ‘토벌대’를 지원한 인물이다.

‘이듬해(1909년) 폭도가 각지에 봉기하여 고향인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도 경박한 무리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수비대가 파견돼 진압에 나섰다. 정씨는 가뭄에 단비처럼 기뻐하며 집을 개방해 임시 영사로 제공하고 양곡과 여러 가지 편의를 도모하였다. 군량미 기증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대장 고문 역할을 맡아 숙식도 잊은 채 부락민 망동을 경계하고 인심 안정을 도모했다.’(1935년 10월 3일 ‘경성일보’)

의친왕과 함께 거창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정태균에 관한 ‘경성일보’ 기사. 의병 토벌 일본군에 군량미와 군영을 제공한 공로로 총독부 표창을 받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이 기사에 나오는 ‘정씨’가 의친왕 이강과 독립운동을 도모했다는 그 정태균이다. 당시 거창, 합천 삼가, 함양 안의 등지에서 거병한 의병들은 1909년 가을 무렵 일본 토벌대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때 정태균은 자기가 살던 고택을 토벌대 막사로 제공하고 군량미를 대줬다.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에도 동일한 표창 근거가 기록돼 있다.(국사편찬위, ‘근현대인물자료’(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 표창자명감’))

이강은 거창에 간 적 없다. 정태균은 의병이 아니라 의병 토벌대를 지원했다. 이게 역사적 사실이다.

‘공립협회’ 설립자는 ‘의친왕 李堈’이 아니라 ‘李剛’

의친왕 후손과 일부 학계는 다른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탈취’해 의친왕 이강 명예를 세탁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민족운동 단체다. 1908년 친일파였던 대한제국 고문 스티븐스 암살 사건을 주도했다. 1903년 9월 창설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가 전신이다.

그런데 의친왕은 공립협회와 무관하다. 상항친목회가 조직된 1903년 9월 의친왕 이강은 폭행사건에 연루돼 워싱턴DC 공사관에 체류 중이었다. 공립협회가 창설된 1905년 4월에는 일본에 체류하며 대한제국 귀국을 시도하고 있었다.(정병준, ‘김규식과 의친왕: 미국 유학시절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52, 한국사학회, 2023)

공립협회를 창립한 사람 이름은 이강이다. 그런데 의친왕 ‘李堈(이강)’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李剛(이강·1878~1964)’ 선생이다. 이강은 1905년 4월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만들고 1905년 11월 22일 ‘공립신보’를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이후 이강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해조신문’ ‘대동공보’를 발행하고 1909년 안중근 사건에도 간여했다. 독립운동가 이강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공립협회를 창립한 이강은 의친왕 이강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이강(李剛)’이다. /독립기념관

나아가 이들은 해방 후 의친왕 이강이 한국독립당 고문 및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한다.(이준, 앞 논문) 날조다. 한독당 간부로 활동했던 이강 또한 의친왕 이강이 아니라 이 독립운동가 이강이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 및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의친왕 후손들은 세종시 학술대회가 열리기 직전인 지난해 6월 15일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의 ‘공립협회’ 항목에 ‘의친왕 이강이 조직했다’는 내용을 삽입해 놓았다.

의친왕 후손측이 ‘위키피디아’에 끼워넣은 공립협회 부분. 독립운동가 이강(李剛)이 아니라 의친왕 이강이 조직했다고 날조했다.
'위키피디아' 편집 내역. 의친왕에 관한 세종시 학술대회 직전인 2024년 6월 15일 Nycanylee라는 id를 쓰는 인물이 '의친왕 이강'을 삽입한 기록이다. 의친왕 후손 측으로 추정되는 이 id 인물은 '나무위키'에도 다수의 편집을 반복하다가 차단당했다.

이용당한 독립운동가 김재계

의친왕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이영주는 이렇게 주장했다. ‘송암 김재식은 창릉 참봉, 중추원 의관, 내장원경, 한말 통리군국사무아문 내부협판 등을 지내 의친왕과 가까웠다. 1910년 김재식은 의친왕 명으로 현 세종시 용포리로 이사해 의친왕 소유 금광을 관리하며 부를 축적해 충청도 이남 3대 부호가 됐다.’(이영주, ‘황실 직속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의 세종, 충남지역 항일활동’, 세종시, 앞 책)

의친왕이 ‘제국익문사’라는 항일 조직을 지휘했는데, 그 재무 담당이 내장원경을 지낸 김재식이라는 주장이다. 세종시는 이를 근거로 김재식 고택을 ‘황실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세종시장 최민호, ‘개회사’, 세종시, 앞 책, 등)

기록을 찾아보자.

김재식 문집인 ‘송암집’에 기록된 김재식 행장에 따르면 김재식은 1901년 창릉 참봉에 제수됐고 1902년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중추원 의관에 제배됐다. 그리고 1903년 가선대부에 가자되면서 내장원경에 제수됐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송암집’2, 행장, 흥문당서점, 1930)

이 주장을 학계에서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김재식이 ‘내장원경에 임명돼 1905년 내장원의 관리 재산이 최대 규모에 이르렀을 때 그 책임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고종실록 1894년 7월 15일 자 인사 기록에 김재식이 외무아문 대신으로 올라 있다’고 주장했다.(이태진, ‘의친왕 이강과 송암 김재식의 유대 관계 추적’, 세종시, 앞 책)

그런데 실제 기록은 이렇다. 김재식은 1905년 2월 1일 내장원경에 임명됐다.(1905년 2월 1일 ‘고종실록’) 하지만 그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송암집’2, 행장) 이에 따라 고종 정부는 이틀 뒤인 2월 3일 오영석(吳榮錫)을 후임 내장원경에 임명했고, 그마저 고사하자 윤최영(尹最榮)을 2월 17일 내장원경에 임명했다.(1905년 2월 3일, 2월 17일 ‘고종실록’) 김재식은 임명만 됐을 뿐 내장원경이 된 적이 없다.

그리고 외무아문 대신에 임명됐다는 주장도 조작이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 논문에 이날 인사가 난 사람들을 표로 정리해 놓았다. 다른 인물들은 모두 한문으로 표기했지만 ‘김재식’과 ‘김가진’과 ‘어윤중’ 세 사람은 이름을 한글로 인용했다.

실제 ‘고종실록’ 해당 기사 원문은 이렇다. ‘김윤식(金允植)을 외무아문 대신으로, 김가진(金嘉鎭)을 협판으로, 어윤중(魚允中)을 탁지아문 대신으로.’(1894년 7월 15일 ‘고종실록’)

김재식이 아니라 ‘김윤식’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DB에 실록 원문이 영인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 위원장은 김재식을 재무 전문가로 둔갑시켜 의친왕과 연결했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김재식이 외무아문대신에 임명됐다는 기록’이라고 주장한 ‘고종실록’. 김재식이 아니라 김윤식이다./국사편찬위원회

더 결정적인 오류 혹은 조작은 또 다른 ‘명예 탈취’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이 김재식은 천도교계통 민족운동가였다. 이 전 위원장은 1926년 4월 설립된 ‘천도교 청년동맹’ 지도자 5명 가운데 김재식 이름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지도자로서 위원 5명 신태순(申泰舜) 김경술(金庚威) 유한일(劉漢日) 김재식(金在植) 박내홍(朴來弘)을 선출했다.’(이태진, 앞 논문) 여기 나오는 ‘김재식’은 한국사DB 국역본에도 ‘김재식(金在植)’으로 나와 있다.(‘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思想問題에 關한 調査書類」3, ‘天道敎靑年同盟 第5回 執行委員會 開催에 關한 件’ 1927년 8월 15일)

이태진 전 위원장은 이를 근거로 이렇게 주장했다. ‘청년동맹에 김재식 이름이 의친왕의 영향력에 따른 것을 일본 당국이 알았다면 의친왕의 활약은 더 용납될 수 없었다. 의친왕은 1927년 말(?)부터 요시찰 대상에 오른다.’ 결국 천도교계 항일 세력 또한 의친왕이 지휘했고 이에 따라 의친왕은 요시찰 대상이 됐다는 주장이다.

사실이 아니다. 이 전 위원장은 ‘잘못 해독한 국역본’만 인용했다. 영인돼 있는 서류 원문에 필기체로 적혀 있는 이름은 ‘金在’만 해독 가능하고 맨 끝 글자는 모호하다. 그리고 한국사DB에 있는 천도교 관련 일본 문서 원본에는 하나같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金在桂'

독립운동가 ‘김재계(金在桂)’에 관한 문서. 의친왕 후손 측은 이를 ‘김재식(金在植)’으로 조작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판독이 애매한 필사본 서류. ‘金在’ 다음 글자는 植으로도 桂로도 보인다. 다른 문서들과 교차검증하면 이 글자는 桂다. /국사편찬위원회

김재식이 아니라 ‘김재계’다. 1942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독립운동가 성암 김재계 선생이다. 이 전 위원장은 한국사DB에 편철돼 있는 다른 사료들을 외면하고 오역된 국역본만 인용해 이를 김재식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 성암 김재계. 의친왕과 함께 독립운동 조직을 운영했다는 ‘김재식’은 독립운동가 ‘김재계(金在桂)’를 조작한 인물이다. /독립기념관

의친왕 세력은 두 독립운동가 명예를 도용해 의친왕 선양 작업에 이용했다. 의친왕 이강 후손의 조상 선양에 학계가 이론을 제공하고 지자체가 가짜 뉴스를 선양하는 기이한 일이 대한민국 공화국에서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