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새소리와 함께 여는 아침이 상쾌하다. 사는 곳이 도립공원 산 아래여서 온갖 새들이 날아든다. 조류 가운데 가장 ‘빅마우스’(bigmouth)는 단연 까치다. 몸을 흔들며 울 땐 그야말로 깍깍거리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진다.

거실 앞 큰 소나무는 새들에겐 완벽한 쉼터다. 까치 두 마리가 자주 들락거리더니 장송 꼭대기에 둥지를 짓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폭설에도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한 땀 한 땀 쌓아 올리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머리에 눈을 인 채 강풍 속에서도 둥지를 지키는 까치였다.

5층 아파트 거실에선 같은 눈높이에 있는 까치 둥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소나무 꼭대기에 앉은 까치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이 아이가 사람을 ‘의식’한다는 게 느껴진다.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불청객 ‘인간 동물’로 여기는 것이리라. 잠시 앉아 있다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며 쌀쌀맞게 날아간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까치는 인간 6세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 사람 얼굴을 구별하고 기억한다는 것이다. 아하, 그래서 이 아이가 유리창 너머 주시하는 사람을 성가셔하는구나. 도움이 되기는커녕 까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이후론 까치 사생활을 존중해 창가에서 멀리 떨어져 망원 렌즈로 보면서 사진을 찍곤 했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까치는 친숙한 존재다. 오래 길조(吉鳥)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일변했다. 전봇대에 둥지를 짓는 까치 습성 때문에 정전 사고가 잦아 한국전력공사로서는 기피 대상이다. 머리 좋은 까치가 철사까지 물어와 튼튼하게 둥지를 짓는 바람에 합선이 빈발한다.

까치는 과일 농사를 망치는 주범이기도 하다. 하나만 먹으면 좋으련만 튼튼한 부리로 수많은 과일에 입질해 과일 농사를 버려놓는 사례도 있다. 견고하게 막아놓은 비닐하우스에도 교묘하게 침투해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농민들에게 시름을 안기는 게 까치라고 한다.

까치가 정전을 초래하고 농사를 망칠 때 우리는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까치가 참새, 고라니, 멧돼지 등과 함께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된 이유다. 하지만 까치는 원래 마을 주변에서 사람들과 가깝게 살아온 조류였다. 인간이 까치의 영역을 자꾸 침식해 들어가서 문제가 생기는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조류 세계에서 까치의 위세는 대단하다. 자기 영역을 침범한 독수리를 까치 무리가 쫓아내는 믿기 어려운 동영상까지 존재한다. 까치가 작은 뱀을 죽이는 자료 화면도 있다. 까치에겐 ‘마을의 조폭’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실제로 집 뒷산에서 다른 새를 까치가 위협해 쫓아내는 모습을 자주 본다. 까치들끼리 쫓고 쫓기는 영역 다툼도 치열하다. 동네 산책길에서 제일 많이 눈에 띄는 조류도 까치다. 익숙해져서 그러는지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담대한 새다.

그런데 내 맘대로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라고 이름 붙인 거실 앞 소나무의 어른 까치 한 쌍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지난 몇 달 그렇게도 자주 드나들더니 종적이 묘연하다. 궁금하고 걱정도 됐는데 알을 낳고 키우는 데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 전엔 작은 아기 까치 두 마리가 둥지 근처 가지에 잠시 앉아 있다가 날아갔다. 이 둥지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 옛집을 영영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것일까. 엄마 아빠 까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자연의 섭리이지만 빈 둥지를 보는 마음이 허전하다.

우둔한 인간을 ‘새대가리’라고 부르는 건 새에 대한 모독이다. 까치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새는 늘 인간보다 나은 답을 찾는다’는 한 조류학자의 흥미로운 관찰을 되새기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까치 둥지는 텅 비어 있다. 내 친구 까치가 돌아오는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