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프로그램 녹화 현장을 구경할 기회가 생겨서 다녀왔다.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는 방청객 없이 진행되는 교양 프로그램인데 마침 우리 부부와 친한 배우 임세미씨가 출연하는 회차를 지켜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쇼의 제작자인 이동원 PD는 배우 박호산이 출연하는 연극을 같이 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내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의 팬이라고 해서 한층 더 친해진 경우다. 그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정인이 사건’을 보도해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최근엔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던졌다. 꼬꼬무는 평소 나도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아내가 이 PD에게 배우 임세미를 출연자로 추천함으로써 전격 녹화 관람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임세미씨와 알게 된 사연도 재밌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방송국 주차장에서 “차량 등록을 안 한 차는 여기 세우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이동원 PD가 번개처럼 나타나 ‘이분은 취재차 오신 거다’라고 경비원에게 거짓말을 해주더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취재도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웃었다. 스튜디오 안에서는 이야기꾼(일명 장트리오: 개그우먼 장도연, 방송인 장성규, 배우 장현성) 중 한 명인 장도연과 임세미가 리허설을 했다. 그들 주변엔 얼른 봐도 서른 명은 넘어 보이는 스태프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하며 무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관계자 중 방청객은 아내와 나 둘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PD의 설명에 의하면 이 프로그램에만 작가가 40명이나 되고 150명의 스태프가 배정되어 계속 사건을 발굴하고 돌아가면서 녹화한다고 했다. 우리는 혹시라도 촬영에 방해가 될까 봐 숨을 죽인 채 눈치껏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메모했다.
국내 최초 본격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을 표방하는 꼬꼬무는 매회 ‘그날’ 벌어진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다루는데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과 내러티브를 강조하는 형식이다. 카메라가 돌아가면 이야기꾼들은 사건을 직접 겪은 당사자나 목격자의 입장이 되어 친구에게 들려주듯 반말로, 생생하게 그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출연자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라거나 때로는 분노하고 눈물도 흘리며 스토리가 주는 메시지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날은 1978년 D방직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 탄압 사건이었다. 어느 날 새벽 회사 앞에 있는 사진관의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여공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공장 생활에 필요한 들기름과 소금 등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자 게스트 임세미의 눈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진행자 장도연의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4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임세미에게 현실로 전달된 것이다. 현대사 어디에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세상도 있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영민하고 공감력 충만한 배우 임세미를 추천한 사람으로서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 꼬꼬무는 게스트에게 녹화 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진정성 있는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임세미는 연예인으로서 꾸며진 모습이 아닌 정말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카메라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덕분에 방청객인 나와 아내는 물론 꼬꼬무의 제작진 모두가 임세미의 모습에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 소회를 밝혔더니 이동원 PD는 진작에 성북동 우리 집에서 열렸던 북토크 행사 때 와서 스스럼없이 설거지하는 임세미를 보고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며 미소 지었다.
녹화가 모두 끝나고 우리를 또 한번 감동시킨 사람은 장도연이었다. 내가 선물로 가져간 책에 사인을 해주고 있던 장도연에게 여성 스태프 한 명이 다가가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영상 편지를 찍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스마트폰으로 아버님의 쾌유를 빌고 카메라 앞에서 큰절까지 올린 것이다. 박수와 공감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좋은 프로그램은 좋은 사람들이 만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울러 우리가 무심코 보는 프로그램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가 숨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발표회장이나 행사장, 식당 뒤에 김민기처럼 자신을 ‘뒷것’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 사람들 덕에 나도 있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