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사는 노년의 독신남, 히라야마씨는 공중화장실 청소부로 일한다. 그는 매일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산다. 새벽에 일어나 분재에 물을 주고, 아침밥 대신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하나 뽑아 마시고는, 낡은 승합차를 끌고 일터로 간다. 종일 묵묵히 일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 잠든다. 휴일이나 여가 시간에는 자전거를 타고 빨래방이나 대중목욕탕에 가고, 단골 술집에 들러 늘 똑같은 술을 마신다. 그의 취미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와 분재로 키울 만한 식물 채집하기, 낡은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 듣기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한없이 단순한 그의 삶을 성실하게 따라간다. 멋들어진 컴퓨터그래픽이나 스펙터클한 전개는 없지만 주연배우의 깊이 있는 연기와 영화 전반에 흐르는 고요한 풍경에 끌린 관객들이 13만명이나 극장을 찾았다. 한 친구는 이 영화를 보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나 역시 영화를 보며 ‘나랑 비슷하게 사는 사람이 나오네’ 싶었다. 프리랜서로 산 지 올해로 25년. 나의 하루도 몸에 새겨진 시간표대로 움직인다.
아침 8시쯤 일어나 개에게 밥을 주고, 나 먹을 밥을 준비한다. 하루 중 가장 신경 써서 먹는 것은 아침밥이라 시간이 들더라도 좋아하는 메뉴들로만 꾸린다. 뭘 먹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1인 가구의 특권,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프리랜서의 특권이기에 아침밥만큼은 최대한 여유 있게 즐긴다.
이후에는 업무를 시작한다. 메일함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보며 회신해야 할 내용을 살핀다. 업무 관련 연락은 받은 즉시 회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할 때, 오지 않는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큼 고역이 없기 때문이다. 신속한 연락은 신속한 업무 진행을 돕기에, 나부터 빠르게 응답하려 한다.
그다음에는 원고를 쓰거나 글쓰기 수업을 준비하고, 읽어야 할 책을 읽는다. 원고는 늘 마감에 앞서 마무리한다. 완성한 원고나 수업 자료는 담당자가 출근하자마자 볼 수 있도록, 마감일 아침 8시에 맞춰 예약 메일을 보내둔다. 작업 중간중간, 허리가 뻐근해지거나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면 빨래를 개거나 청소기를 돌리고, 화장실 청소나 설거지를 한다.
오후 세 시 무렵이면 자체적으로(!) 퇴근한다. 그러고는 개와 산책을 나간다. 한 시간쯤 걷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개에게 밥을 챙겨주고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방바닥을 뒹굴거나 보고 싶은 영상물을 찾아본다. 오후 5시 반쯤 되면 그날의 두 번째 끼니를 차려 먹는다. 남는 시간에는 집 정리를 하거나 그 밖의 생각나는 것들을 한다. 밤중에 일정을 잡아 밖에 나가거나 늦게까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1년에 몇 번 없다.
저녁 뉴스를 챙겨보고 나면 개 양치를 시키고, 거실에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과 윗몸일으키기를 120번 한다. 씻고 나면 밤 10시쯤. 읽던 책을 챙겨 슬슬 침대로 들어간다. 금세 잠들고 싶지 않아 스마트폰으로 소셜미디어를 둘러보거나 책을 더 읽으면서 시간을 끌지만 가급적 1시 전에는 잠든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앞의 쓴 순서대로 하루를 산다. 판에 찍어낸 것 같은 하루를 25년 반복하다 보니 오늘이 됐다.
글 쓰는 사람은 독특한 일상을 살 거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프리랜서는 매일 놀고 매일 늦잠 잘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프리랜서들은 대부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퇴근한다. 마치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처럼 판에 박힌 듯한 일상이 지겹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니, 지겹더라도 꾸역꾸역 해나가는 사람이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것 같다.
지겨워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늘 즐겁진 않더라도 관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불쑥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지 않고, 일정 온도의 애정을 지속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게 곧 천직 아니겠는가.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나면 흑백 영상들과 함께 자막이 흐른다. “‘코모레비’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코모레비’는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이렇게 지루하고 평범하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하루를 사는 것은 찰나에 찾아오는 빛을 만나는 일, 순간에 집중하는 일이라는 것을 영화는 알려주었다. 편안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는 것도 내 능력이 아닌 축복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설날이 지났다. 더는 변명의 여지없이 새해 일상에 적응할 시간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일상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짧고 굵은 다짐을 해본다. 새해에도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가 묵묵히 이어지기를. 그게 바로 완벽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