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겪은 여행의 단상을 아래 적어둡니다. 작가들은 여행 도중 많은 글감을 길어 올립니다. 낯선 장소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함에 대해 적을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낯선 곳에도 여전히 있는 익숙한 것에 대해, 익숙함을 넘어 환멸이 생길 정도로 지겨운 것에 대해 쓸 때가 더 많습니다.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는 듯 말입니다. 다만 이 지겨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미세하게 톺아보거나 비틀거나 뒤집어 보기도 합니다. 진정한 새로움이란 나를 둘러싼 현실의 변화가 아닌 현실을 바라보는 내 시각과 태도의 변화에서 오는 까닭입니다.
진주. 선배를 만났다. 바람 냄새가 조금 덜해졌고 따뜻해 보이는 겉옷을 입고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닭칼국수를 먹었다. 우리가 만나면 으레 먹던 음식이다. 여전히 선배는 국물에 잔뜩 후추를 넣었다. 여전히 나는 미안한 마음에 선배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삼례. 무궁화호를 탄다. 구례구역까지 가야 한다. 창밖 2층 양옥에 널린 빨래들. 부지런한 사람이 사는 듯하다. 흰옷이 많기 때문이다. 이어 수로와 고랑과 이랑이 보인다. 봄이 지나고 나서야 밤나무로 보이기 시작한 저기 낮은 산의 나무들.
동해. 한번은 아버지에게 왜 승용차를 두고 새벽 첫차를 기다리고 버스로 환승까지 하며 출근을 하시느냐 물은 적이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사람을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버지가 답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참 반갑지 않겠냐고.
함양. 숲 한가운데 공터가 있다. 군음식을 조금 사서 오겠다던 친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기다란 빛이 떠났고 드리워졌던 그늘도 덜미를 잡혔다. 무엇이 더 있을까마는 한편으로는 없을 것도 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방에 불을 넣을 시간이다.
서산. 저녁이 밤이 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만으로 하루가 충분해질 때가 있다. 만약 오늘 하루의 시간을 다시 살아내야 한다면 꼭 같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
충주. 방문을 안에서 잠그고 나왔다. 두고 와야지 했던 것들은 깜빡 잊고 가방에 다시 담아 왔다.
광명. 시간은 잘도 간다. 정해진 방향이 없어 가끔은 과거를 향해서 간다.
하동. 섬진은 작은 티끌이었다가 두꺼비가 모이는 나루다. 차고 기운다. 대낮에 들었던 너의 말은 사실 언젠가 내가 먼저 전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얼마간 강물을 거슬러 걷는다. 바람의 무늬를 본다.
김해. 마중은 기다림을 조금 먼저 보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배웅은 기다림을 조금 먼저 시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도 다시 돌아서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 된다.
군산. 귓병이 나서 읍내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친구가 일하는 건물이 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귀가 아픈 나와 목이 부은 이와 코가 막힌 이가 병원 대기실에 함께 앉아 있었다. 아랑곳없이 내리는 눈.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