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혹독한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였다. 당시에는 나의 증상이 우울증인지 몰랐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책을 보다가 계절성 정서장애(seasonal affective disorder)라는 병명이 있다는 걸, 그게 일종의 우울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고, 누워 있었고, 하루 종일 한기를 느꼈다. 그래서 인스턴트 수프나 라면을 끓여 주로 국물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하루에 한 끼를 간신히 먹었다. 뭐라도 먹어야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인 결과로,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활동적인 일이었다. 7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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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인데, 너무 추웠다. 해가 뜨지 않는 회색빛의 날씨. 내가 여름 날씨를 비정상적으로 감지했던 게 아니라 당시 날씨가 비정상적이었다. 테겔 공항에 도착한 날은 30도에 가까웠는데 얼마 지나 거의 영하에 가까운 기온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7월인데! 3개월을 지내고 돌아올 예정이었던 내게는 가장 두꺼웠던 옷이 경량 패딩이어서 갑자기 추워진 베를린에서 온전할 수가 없었다. 한여름의 옷 가게에서는 갑자기 겨울처럼 추워진 날씨를 위한 옷을 구할 수가 없어서 한국의 가족에게 요청한 나의 옷이 비행기 편으로 오는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직 브란덴부르크 공항이 없던 시절의 일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요즘 나의 기분이 그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다. 우울하다고 느낀다. 계속되는 회색빛의 날씨.

계속해서 들려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더 그렇다. 죽음이 너무 많다. 뭐를 해도 즐겁지 않고 눕고만 싶다. 온몸에 기운이 없고 무기력하다. 나는 뭐를 위해 살고 있는가, 라고 느낀다. 환멸일까? 분노일까? 그 사이 어디쯤인 듯하다. 화가 나고 슬픈데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게 슬프다. 그래서 사람을 피하게 된다. 이럴 땐 혼자가 좋다. 이런 기분을 상대에게 옮기고 싶지도,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싶지도 않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나의 슬픔이나 분노는 혼자 감당하는 게 좋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달아나서 아무 소리도 없는 무중력의 공간 속에 홀로 존재하고 싶다.

이럴 때는 혼자 마셔야 한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마시는 게 술이지만 슬플 때는 혼자 마시고 싶다. 독작(獨酌)이다. 혼술이 아니다. 혼술이라는 말에 있는 가벼움과 장난스러움과 도무지 화합할 수 있지 않을 때는 독작을 해야 한다. 혼술이 광장에서 마시는 술이자 군중 속의 고독에 취하며 마시는 술이라면 독작은 울타리 안에서 나를 안고 마시는 술이다. 고독이거나 외로움이 이 술자리의 필수 구성 요소이다. 그래서 달 아래서 홀로 마신다는 월하독작(月下獨酌)처럼 고고한 아름다움 따위는 없다. 이백의 시 ‘월하독작’에 있는 이런 문장, 그러니까 “꽃 사이에 술 한 병을 놓고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신다”처럼 나른하거나 초월적인 기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울해서 안 마시고 싶으나 우울해서 안 마실 수 없는 이 아이러니의 시간, 위스키 한 잔을 따라서 식탁에 앉는다. 이걸로 끝. 평소라면 위스키에 어울리는 다크 초콜릿을 챙기겠지만 없는 편이 낫다는 판단. 독작에는 뭐가 많이 없는 게 좋다. 위스키를 좀 머금고 있다가 물을 마시고 위스키를 다시 마시는 게 다다. 뭐가 많으면 독작이 아니다.

한없이 쓸쓸하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음에 혼술 할 때는 어디로 갈지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독작을 하고 있으니 너무 적요해 혼술 할 때의 혼돈과 소음이 그리워지기도 해서. 하지만 아직은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하는 시간. 달과 꽃을 보기 어려운 시간. 위스키 한 잔을 오래 보며 마신다. 오늘 밤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