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11월 6일 21시 27분, 22세 무명 배우가 LA 공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시체의 상·하체는 분리돼 있고 입은 양쪽 귀까지 찢겨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시신에 피가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는 것. 해부학 지식 없는 일반인은 불가능할 텐데? 자, 지금부터 탐정이 돼 범인을 쫓아보자!”

추리 수사물 ‘덕후’ 취향 제대로 저격하는 어느 추리 학습지 에피소드다. 미국에서 일어난 ‘블랙 달리아 사건’을 재구성했다는데, 오싹오싹. 이 학습지에는 연쇄살인과 납치·테러·유괴 등 미제 사건이 실려 있다. 그런데 학습지, 유아·청소년기 학생들이 푸는 것 아니냐고? 너무 잔인하다고?

이 학습지는 다 큰 ‘성인’을 겨냥해 출시됐다. 일명 성인 학습지. 어릴 적 “다섯 장 풀면 놀이터에서 놀게 해주겠다”는 부모님 회유에 구몬·눈높이 붙들고 책상머리에서 머리 쥐어뜯던 기억, 한 번쯤 있을 텐데. 성인이 돼 쳐다도 보기 싫을 것 같은 학습지가 놀랍게도 인기란다. 도대체, 왜?

성인 대상 학습지인 ‘타로 학습지’로 공부하는 모습. /인터넷캡쳐

◇애들은 가라, 고난도 학습지

학습지(學習紙)의 표준국어대사전 정의는 ‘학생이 일정한 양을 학습할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가정에 배달되는 문제지’다. 그리하여 전통 소비자층도 학령인구(만 6~12세)였다. 그러나 학교를 다녀야만 학생인가? 배움에는 끝이 없고 자세만 되어 있다면 직장인도 스님도 목사님도 선생님도 학생이다.

평소 미스터리·추리 장르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는 직장인 김모(30)씨는 추리 학습지를 구독하며 딸려 온 ‘왕초보 법의학 사전’으로 법의학 용어까지 공부한다. 총 6권으로 구성된 학습지에는 FBI와 국내 범죄를 재구성한 사건 30개가 실려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배달되는 학습지를 떠올리지만 이 경우 여러 권을 한 번에 구매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문제 풀이를 돕는 ‘선생님’도 유튜브 영상으로 대체.

성인을 겨냥한 만큼 상당한 난도를 자랑한다. 페이지마다 공개되는 단서를 훑으며 ‘용의자 신상과 주변 인물 인터뷰로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자’ 같은 질문에 답을 써 나가야 한다. QR코드로 접속하면 으스스한 배경음악까지 흘러나온다. 김씨는 “쉬운 산수 문제를 풀거나 운동을 하며 ‘머리를 비운다’고들 하는데 오히려 머리를 쉼 없이 쓰면서 상념을 지우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며 “잠들기 전까지 놓친 단서를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가격은? 할인가 22만9000원. 대상이 성인인 만큼 12개월 ‘할부’ 시 월 1만9000원대라고 홍보한다.

◇부업 배우고 두뇌 개발한다

‘펼치기만 해도 인생을 점치고, 돈도 벌 수 있는 4주 완성 타로 상담가 학습지.’

배움의 영역은 교육과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부업 열풍’에 “취미 찾는 동시에 돈까지 벌 수 있다”는 학습지도 등장했다. 하루 10분, 4주간 타로를 ‘배워’ 결과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타로 학습지, 30일 만에 캐릭터를 그려 출시할 수 있다는 이모티콘 작가 학습지, 아이폰 웨딩 사진 작가 학습지 등.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부업 인구는 57만5000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학습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교원의 구몬. 외국어·한자 등의 ‘성인 구몬’을 만든 데 이어 지난 5월에는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시니어 학습지’를 출시했다. 제2외국어나 국어·수학도 있지만, 공간지각력이나 단어 퀴즈 등 두뇌 개발 전문 영역 제품이 대다수. 전통 강자답게 집에 주 1회 1:1로 학습 내용을 점검하는 방문 학습도 가능하다. 눈높이로 유명한 대교는 브레인 트레이닝이라는 시니어 대상 방문 학습을 진행한다.

최근 만화 ‘명탐정 코난’ 에디션을 내놓은 ‘추리 학습지’/인터넷 캡쳐

◇할당량 정해줘 좋아

재생 시간이 정해진 인터넷 강의와 달리 실력과 상황에 따라 공부 혹은 취미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인터넷 강의는 외부에서 이어폰을 끼고 듣거나 중단하는 일이 빈번해 번거로운데, 학습지는 회사에서 일하는 척(전국 부장님들 오열) 풀 수도 있고 후다닥 끝낼 수도 있다는 것.

상황이 이러니 인강 업체들이 학습지를 출시하며 회귀(?)하는 일도 벌어진다. 인강이 대표 상품인 한 유명 외국어 관련 교육 업체도 최근 중국어·스페인어·프랑스어·독일어 등의 학습지를 내놓고 “한 장씩 가방에 넣어 다닐 수 있다” “하루 5장도 부담. 딱, 1일 1장”으로 홍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MZ세대의 자기 계발 욕구와 학습지의 ‘느슨한 강제성’을 유행 이유 중 하나로 꼽는다. 출근 전·퇴근 후 등 일정 시간을 정해 명상이나 자기 계발을 하는 루틴(routine) 문화와 ‘할당량’을 정해주는 학습지 특성이 맞아떨어진다는 것.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생과 달리 직장인은 시간을 쓸 자유도가 높은 만큼 ‘학습 습관’을 기르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분량을 정해주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