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미 기자가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구둣방에서 구두를 닦고 있다. ‘58년 전통’이라 적힌 문구는 해마다 직접 프린트해 숫자를 바꿔 넣는다고.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구둣방이로소이다.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그 구둣방’으로 불린다. 58년 전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그땐 여기가 광화문 감리교회 마당이었지. 지금이야 번듯한 구둣방 골격을 갖췄지만 그땐 즐비한 판잣집과 비슷한 몰골로 기억한다.

근방엔 부민관(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다 현재 서울시의회)이라는 곳이 있었다. 내 자리에 세(貰) 들어 사는 구두닦이는 옆자리 고령이발관에 드나들던 금배지 단 양반들 구두를 싹싹 닦아주고 5원을 받아 살았다. 요즘 말로 ‘패키지’렷다. 남대문 시장 백반이 10원이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국숫집과 레코드방, 전화상, 시계포, 다방이 차례로 헐리고 빌딩이 오르는 동안 나도 2~3차례 자리를 옮겼다. 그래봐야 반경 10여 m를 전전했으니 광화문이 고향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주말] 조유미 기자의 구두닦이 체험 영상_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구둣방 뒤로 이순신 동상이 보인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반세기 넘게 함께한 구두닦이 양반을 난 ‘박 선생’으로 부른다. 지금은 뜸하지만 한때 “때 빼고 광(光)내달라”며 밀려드는 구두가 하루 130여 켤레요, 김영삼 대통령 구두까지 닦았는데 그를 선생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 때문만이 아니다. “오호, 당뇨가 있으시네.” “심장이 안 좋은가?” “이 양반 성격 빡빡하겠군.” 글쎄, 구두짝만 보고 멀끔한 손님이 어디가 아픈지, 성격이 어떤지 꿰뚫어 보는 것 아닌가. 어느 날은 뒷굽 수선을 하러 온 한 의학박사에게 그가 “구두로 본 내 추측이 맞느냐” 물었는데 “선생 말이 맞다” 하더라니까. 손이 있었다면 무릎을 탁 쳤을 것(무릎도 없지만)이다.

점쟁이 같은 선생 말에 손님 놀라는 재미로 살았는데, 요즘은 통 오는 이가 없다. 그런데 자신을 기자라 소개하는 한 처자가 찾아와 “구두 닦는 법과 수선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 박 선생 왈 “그럼 날 잡아 한번 와 보라”. 이하는 기자가 구두닦이를 체험하며 썼다.

◇손님 하나 없는 날이 대다수

손님이 없다. “없지? 없다니까.” 약 1.5평(5㎡) 구둣방 안. 박흥옥(71)씨가 전기난로에 계란 두 알을 구우며 말했다. 오전 8시 30분부터 기다리길 3시간째. 몇 십 년 전만 해도 오전 11시 30분쯤이면 점심 먹으러 나와 구두를 맡기고 오후 3~4시쯤 찾아갔는데, 최근엔 영~ 찾는 이가 없어 언제 올지 대중도 없다.

세 명 간신히 발붙일 비좁은 구둣방에 멀뚱히 앉아있다 보니 오가는 행인 발만 보인다. 열에 아홉은 운동화. “손님이 10배는 많았다”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1967년 2월 이 자리에 터를 잡은 이후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와 각종 집회·시위, 세종대왕·이순신 동상이 세워지는 모습 등 굵직한 일을 겪었으나 집회에 구두 신고 나오는 사람이 꽤 있었다. 소박하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벌이는 됐다고.

하긴 구두 신는 사람이 적어 백화점에서 구두 브랜드가 철수하는 시대다. 그는 “구둣방은 구역마다 손님 특성이 다르다”며 “내 경우 사드 문제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끊겼을 때부터 일감이 곤두박질쳤다”고 했다. 관광객이 아니라 버스 운전사와 가이드가 많이 왔단다. 이후 코로나로 재택이 활성화되며 구두 신는 사람은 더 줄었다.

한 달 벌이가 궁금하다고 하자 “그런 것 묻지 마라. 지금 봐. 여기 온 지 몇 시간 됐어. 근데 한 명도 안 왔지?”라고 한다. 전날 내린 폭설 때문에 더 없는 것 같다고. 많아야 하루 5~6명, 손님 하나 없는 날도 많단다. 그나마 5000원짜리 구두 닦는 비용에 1만5000원~2만원 하는 굽 수선 손님이 있어 먹고산다고.

약 1.5평(5㎡)짜리 구둣방 안. 반평생 남의 구두를 닦아왔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구둣방 안엔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작은 에어컨과 온풍기, 빼쪽한 총알굽 등과 밑창이 모양·종류별로 담긴 통, 각종 나사와 펜치 등.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구두만 보면 다 나온다

그는 낡은 기모 바지에 K2 운동화 차림이었다. 벌어진 가죽 틈을 노란 실로 꿰매 20여 년째 신고 있단다. 희고 긴 수염에서 대가(大家)의 향이 풍긴다. 박씨가 “아내가 싫어해서 평생 참다가 8개월 전부터 ‘배 째라’ 심정으로 기른 것”이라고 했다. 곳곳에 아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 골방의 사랑꾼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었다. “척 보면 구두 사이즈도 나오나요?” “알지. 이건 275㎜.” 물개 박수를 치는데 박씨가 약간 모자란 친구 보듯 “바로 알기도 하지만 구두 안에 다 쓰여 있는데 어떻게 모르나?” 했다.

박씨는 신만 보고 성격을 척척 맞혔다. 날 보고 “평소 꼼꼼하지 않고 어수룩한 성격”이란다. 끈도 당겨 묶지 않고 대충 구겨 신은 운동화를 보고 알았다고. 머쓱해 하는데 “오히려 좀 바보스러운 게 좋은 거야. 그래야 한자리에서 일을 오래 할 수 있다. 나도 그런 편”이라고 했다. 그는 구두에 허옇게 튄 소변 자국과 당 때문에 들러붙은 먼지를 보고 당뇨를, 신은 지 5~6년 됐는데도 활기차게 걷지 못해 뒷굽이 닳지 않은 구두를 보고 심장병을, 걸을 힘도 없이 신을 끌고 다녀 굽 끝에 보푸라기만 생긴 구두를 보고 “임종이 머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한단다. “누가 알려준 건 아니고 오래 하다 보니 알게 된 거지, 뭐.”

문지르고 또 문질러도 광은 나지 않았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어엿한 순서가 있소이다

구두, 닦을 수 있을까. 그가 “기다리기 적적할 테니 배워 보라”며 박스 하나를 꺼냈다. 포스트잇에는 ‘완납, A사 대표’라고 적혀 있었다. 자주 들르는 회사 대표가 맡기고 갔는데, 가죽에서 강한 광이 나진 않는 ‘캐주얼 구두’라고. 요즘엔 신사화 대신 이런 구두가 편해 많이 신는단다. 박씨가 “광만 번쩍번쩍 낸다고 잘 닦은 게 아니다”라며 “새것처럼 해 놓는 게 잘 닦은 구두”라고 했다.

어릴 적 아빠 구두 닦던 효녀(사실 500원 노림)의 솜씨를 보여주겠다. 구두굽 수선대인 ‘징걸이’에 구두 한 짝을 올리고 솔로 무작정 닦으려는 찰나, “어허. 구두 망가진다”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구두 닦을 때도 어엿한 순서가 있었다. 우선 구두약 묻힌 칫솔로 구두창에 갑피를 대고 마주 꿰맨 가죽 테(일명 ‘대다리’)부터 꼼꼼히 닦는다. 다음으로 손의 검지·중지·약지에 흰 천인 ‘융’을 말아 감고 물먹은 스펀지에 융을 찍어 ‘충분히’ 적신다. 구두약을 ‘충분히’ 바른 다음 구두를 ‘충분히’ 닦는다. 물과 구두약의 배합이 가장 중요하다. “‘충분히’가 도대체 얼마큼이냐” 묻자 “최소한 요 정도 바르면 광이 잘 나겠다는 정도”라고 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네”라고 했다.

다음 광을 낼 때 쓰는 구둣솔인 ‘광솔’로 문지른다. 이 과정에서 날이 추워 약이 굳으면 전기난로 앞에 살짝 갖다 대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그는 “’물광’이니 ‘불광’이니 하지만 구두 닦는 건 사람 얼굴 화장하는 것과 같다”며 “불에 구워 ‘불매끼’ 한다고 광이 나겠나. 죽은 가죽인 구두에 불을 대면 상하고 마르고 광도 오래 안 간다”고 했다.

쉬워 보였다. 그러나 문지르고 문질러도 광은 나지 않았다. “얼마나 문질러야 하느냐” 물으니 “600번 정도. 그렇게 해선 백날 닦아도 광이 안 날 것”이라고 했다. 왼쪽으로 돌려 문질렀다 오른쪽으로 문지르고, 힘주어 세게 밀었다 약하게 밀고. 주름 사이 구석구석 닦아야 광이 날까, 말까. 하루에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밖에 배운 게 한 트럭 분량이지만 지면 사정으로 이만 줄인다.

어떻게 닦아야 광이 나는 거여.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사람들 발만 보였다

구두닦이의 세계는 심오했다. “솔로 문지를수록 광이 죽는 구두도 있다” “스펀지로 쓸어 마무리 작업을 하기도 한다”…. 낮 12시 30분쯤, 기술을 끝도 없이 읊던 그가 도시락을 꺼냈다. 아내가 싸준 콩밥 한 주먹에 반찬은 고추 조림·파래·갓김치. 평일이면 연남동 집에서 30분가량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데 “하루 1원도 안 쓰는 날이 대다수”라고 했다. 집회가 있는 주말과 공휴일엔 경찰 바리케이드로 사방이 막혀 나오지 않는단다.

구둣방 안엔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작은 에어컨과 온풍기, 빼쪽한 총알굽 등과 밑창이 모양·종류별로 담긴 통, 각종 나사와 펜치, 드라이버와 가위, 본드 칠한 붓을 굳지 않도록 담아 두는 시너…. 가장 오래된 연장은 송곳이다. “근처 신한은행 앞에서 구둣방 하던 분에게 물려받았다”며 “해방 전부터 썼다니 최소 90년이 넘었을 것”이라고 했다.

심심하진 않을까. 박씨는 “그럴 땐 유튜브로 운동 영상을 본다”고 했다. 팔운동을 위해 올해부터 7㎏짜리 아령을 하루 2000번씩 들기 시작했는데, 무리했는지 지난 4월 마비가 와 수술을 받았다고. “손으로 구두약 먹여가며 하는 일이니 생명력이 있는지, 그래도 여기 빼면 아픈 곳 없이 건강하다. 복 받은 것”이라고 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자리에서 구두를 닦고 싶다고.

이날 6시간가량 상주하는 동안 끝내 손님은 오지 않았다. 터덜터덜 회사로 향하는데 또 회사 사람들 발만 보였다. 구두 신은 사람은 2명뿐. 저 구두는 마지막으로 언제 구두약을 먹었을까. 구두들이 배고파 보이는 날이었다.

조유미 기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구두 닦는 천을 손가락에 말아 감고 있다. 이것마저 어려울 일이냐.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