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사람 중에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80년대생 여자로 대만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그의 낙은 넷플릭스에 있는 삼국지 시리즈를 보고 또 보는 것이라고 했다. 회식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또 집에서 술을 마시며 삼국지를 본다고.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와 술을 마시며 이 혹하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나도 ‘삼국지 놀이’를 해볼까 했다. 하지만 95부작이라기에 가볍게 단념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랬었는데… 이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며칠 전 밤에 적토마가 내게로 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관우의 말, 그 적토마 말이다. 적토마를 마시게 되었던 것이다. 토종닭을 전문으로 하는 꼬치집에서 주인의 추천을 받아 시킨 고구마 소주의 이름이 적토마였다. 메뉴판에는 ‘세키토바’로 되어 있어서 시킬 때는 적토마인 줄 몰랐다. 주인이 술병을 꺼냈을 때 “아아, 적토마네요”라고 이야기한 건 바로 삼국지를 좋아하는 그녀였다.
적토마의 뜻을 아시는지? ‘붉은 토끼를 닮은 말’이 적토마였다. 당연히 붉은 흙 같은 말이 적토마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 밤에 ‘赤兎馬’라는 술의 이름을 보고 우리는 당황했다. 붉은 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말이 뛰는 걸 상상해왔는데 토끼라니. 붉은빛이 도는 털을 가진 말이 토끼처럼 빠르다고 해서 적토마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토끼가 빠름의 상징이라니 납득하기가 힘들다.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적토마의 웅장함에 토끼 하면 떠오르는 아기자기함이 도무지 붙지 않아서. 붉은 글씨로 쓰인 적토마는 힘이 넘쳐 술병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기에 더.
‘적토마’라고 쓰인 필체의 위용이 상당해 나도 모르게 ‘오우’ 하는 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빨간색의 글씨에서 힘줄과 근육이 약동하는 적토마의 몸이 느껴졌달까. 핏빛 같은 암홍색으로 된 근육 덩어리가 달리면 흙먼지가 일어나는데… 어찌나 빠른지 형체를 알기 어렵다… 그저 불타오르는 것 같은 게 있는데 알고 보니 말갈기더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세키토바를 마신 건 아닌데, 적토마를 생각하니 적토마를 계속해서 묘사하고 싶은 이 마음은 뭔지 모르겠다.
장대한 서사지 않습니까? 삼국지를 좋아하는 그녀와 적토마를 마시게 되다니. 그때는 이 희미한 점들을 연결 짓지 못했다. ‘아아, 내가 삼국지를 좋아하는 그녀와 적토마를 마시고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군’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안심, 다리살, 꼬리살, 윗날개살… 주인이 부위별로 내주는 닭을 먹느라 바빴다. 고구마 소주는 참숯(이겠죠?) 연기가 더해진 닭 꼬치에 더할 나위 없었고, 그래서 집중하느라 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며칠 밤이 지나고도 그날 밤의 풍취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술과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그녀와 나는 가고 싶은 식당이나 술집이 생기면 보는 사이다. 하는 이야기도 음식과 술, 거기에 좀 더하면 책과 영화다. 좋아하는 음식이나 술도 맞는 편, 영화도 맞는 편이다. 그래서 이것저것이 연결되지 않기가 힘들다. 그날 그녀는 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마 구이를 기다리면서였다. 간 것도, 채 친 것도, 구운 것도 모두 좋다며 마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고 했다. “고노와다랑 마 같이 먹으면 죽이지 않나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참마죽’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마 마니아가 그 소설을 읽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라고.
아니다, 별일이 아닌 게 아니다. 그 이름도 웅장한 적토마인데! 술도 맛있어서 더 그렇다. 적토마는 고구마 소주답게 향기로웠다. 이렇게 쓰고 자신이 없는 게 나는 ‘소추’라고 하는 일본식 소주를 잘 모르고, 그렇기에 고구마 소주가 보리소주나 메밀소주보다 향기로운지 확신이 없다. 사람들이 그렇다고들 하는데 그런 건 근거로 내세우기에는 좀 그렇다. 내가 충분히 그렇다고 느껴야 진실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 정도가 못 돼서 소추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내가 마셨던 고구마 소주들은 풍미가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날 밤의 적토마는 유난히 향기로웠다. 잘 익은 과일에서 나는 농밀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코끝을 찡그렸던 것이다. 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