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 국가대표인 '삐약이' 신유빈 선수가 2024 파리올림픽에서 경기 중간 휴식 시간마다 각종 간식으로 열량을 채우며 전열을 가다듬는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런 먹방을 기다려왔다. 납득이 되는 먹방 말이다.

2024 파리올림픽의 최고 화제 중 하나는 탁구 국가대표 ‘삐약이’ 신유빈(20) 선수의 먹방이었다. 신 선수가 경기 중간 휴식 시간에 각종 간식을 먹으면서 열량을 채우고 전열을 가다듬는 모습이 포착되면서다. 어머니가 현지에서 만들어줬다는 주먹밥, 바나나와 납작복숭아 같은 달콤한 과일, 짜먹는 스포츠 에너지젤과 빨간 이온 음료 등이 연이어 등장했다.

어릴 때부터 탁구 신동으로 유명해 ‘국민 딸내미’라 불리는 신 선수.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딱핀으로 올려붙인 그가 야무지게 간식을 오물오물 챙겨 먹으며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에 국민들은 직감했다. 저 음식들은, 심심풀이 혀의 사치나 인스타 자랑질용이 아닌, 오직 피가 되고 에너지가 되어 승부에 직결되는 필수 영양소란 걸.

“먹는 것도 어쩜 저리 야물딱지고 기특할까” “외모·이미지 신경 안 쓰고 필요한 걸 똑똑하게 챙기네” “기업들 뭐 하냐, 어서 유빈이 광고 줘라”.

2024파리올림피겡서 탁구 혼성 복식 경기에 나서 동메달을 획득한 임종훈-신유빈 선수가 경기 중 바나나를 먹으며 작전 타임을 갖는 모습. 바나나는 열량 공급이 빠르고 소화가 잘돼 운동하는 이들이 즐겨찾는 건강 간식이다. /kbs

방송 중계하던 한 해설위원은 “신 선수가 바나나를 먹으면서 상대의 바나나플릭(테이블 위에서 손목을 돌려서 거는 백핸드 톱스핀 기술) 기술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신 선수는 20년 만에 한국 여자 단식 탁구로 올림픽 4강에 오른 뒤 이 먹방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간식을 안 먹었다면 못 이겼을 것”이라며 “잘 먹고 잘 쉬고 상대 분석 잘해서 시합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신 선수 경기 때마다 승부와 관계없이 “오늘은 또 무슨 먹방이 나오려나?” 술렁였다. 국내 중소기업과 시골 농가까지 ‘신유빈 특수’를 톡톡히 봤다. 그가 단식 8강전에서 머리에 얼음 주머니를 얹고 짜먹은 에너지젤은 방송에서 정확한 상표명이 노출되지 않았는데도 빠르게 입소문을 타며 당일 품절됐다. 스포츠 영양식품 제조업체 요헤미티의 제품이었다.

신유빈 선수가 파리에서 먹은 납작복숭아 덕에 국내에선 생소한 이 고가의 복숭아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면서 관련 농가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납작복숭아는 여름철이 건조한 유럽과 중국 등지에서 주로 생산되는 품종이다. /mbc

신 선수가 파리 현지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이는 납작복숭아도 인기다. 도넛 모양의 납작복숭아는 껍질이 얇고 당도가 높아 여름이 건조한 유럽과 중국 등지서 주로 생산되는 과일이다. 국내에선 경북 의성·경산과 전북 임실 등에서만 한정 생산되는 고가의 품종인데, 이번에 ‘신유빈 복숭아’로 각 대형마트 예약 판매분까지 완판되고 “공급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빗발친다고 한다.

그간 우리는 넘쳐나는 먹방을 넋잃고 바라보며 체기가 들리곤 했다. 먹방이 한국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의 주요 콘텐츠이자 천문학적 돈벌이 수단이 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주로 육류와 패스트푸드, 자극적인 배달·외식 음식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한꺼번에 많이, 빨리 먹는 대식(大食), 그리고 혐오스럽거나 이상한 음식을 역시 닥치고 씹어대는 괴식(怪食)이 먹방 시장을 지배했다.

한 여성 유튜버가 수제버거 여러개와 튀김류를 한꺼번에 먹어보이는 컨텐츠를 방송하고 있다. 한국에선 유독 이런 대식 괴식형 먹방이 유튜브와 소셜미디어의 주요 컨텐츠로 인기를 끈다. /유튜브 캡처

외국에도 ‘푸드 파이터’ 같은 장르가 있긴 하지만 난폭한 대식·괴식의 비중이 큰 한국식 먹방은 2013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Mukbang’으로 등재될 정도로 독특한 면이 있다. 한국 먹방은 유독 음식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후루룩’ ‘쩝쩝’ 소리를 크게 내고, 가녀리고 예쁜 여성들을 내세워 식욕과 성욕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해외서 음식 포르노(food porn)로 불릴 정도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미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이런 말초적 K먹방의 배경을 한국의 경제 발전에도 뿌리 깊은 음식에 대한 집착, 장기 침체와 경쟁 사회에서 널리 퍼진 불안, 1인 가구 급증에 따른 고독, 과도한 다이어트 붐의 반작용 등으로 분석했다.

요즘은 이와 정반대로 비정상적으로 마른 사람들이 만두 하나, 커피 한 잔을 하루종일 깨작거리곤 배불러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소식좌 먹방’이 틈새시장을 노리기도 한다.

이런 극단적 먹방과는 결이 다른 먹방들, 즉 신유빈 먹방처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먹방들이 생겨나며 입소문을 타고 소소한 인기를 끌고 있다.

강원도 정선고의 이원재 교사가 학생들과 소통을 위해 올리는 '오늘의 급식' 소개 먹방. /인스타그램

강원도 정선고의 국어 선생님이자 학생부장인 이원재 교사는 지난해부터 소셜미디어에 ‘급식 먹방’을 올려 화제가 됐다. 시끄러운 학교 급식실에 앉아 철제 식판에 소박하게 담긴 메추리알조림, 돈육김치볶음, 콩나물국 등 그날의 반찬을 소개하며 “시험 기간이라 힘들죠? 시험 땐 선생님도 힘들어요. 그래도 급식 거르지 마세요”라며 맛있게 먹어보이는 식이다. 음식 먹방이라기보단 학생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기 위한 장치다.

꼭 필요한 한 끼를 정성껏 차려먹는 시골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먹방도 많다. 2020년 전남 무안의 김효순씨가 대학 입학을 앞두고 반년여 연재한 유튜브 ‘시골 가족’은 생선찌개에 달걀프라이, 김장김치, 통째 올린 김 등으로 차린 밥상에 둘러앉은 3대 다섯 식구가 묵묵히 밥 먹는 먹방으로 히트했다. “언니 먹으라고 달걀 반숙 혔어” 같은 대화 외엔 별다른 음향도 없다. 가장은 한 그릇을 채운 뒤 말없이 구들장을 베고 드러눕는다.

수년 전 전남 무안의 한 가족이 올린 '시골 가족' 먹방. 먹방이라기엔 너무나 평범한 농가의 일상적 끼니의 모습을 조용히 보여줬다. 현재는 볼 수 없는 컨텐츠이지만, 이후 유사한 시골 먹방이 도시 사람들과 MZ 세대 등으로부터 소소한 인기를 끌고 있다. /유튜브

요즘은 노모 모시고 사는 전주의 48세 노총각이 돼지김치찌개, 카레라이스, ‘너물비빔밥’ 등 끼니를 지어 먹는 ‘밥주TV’, 팔순 주부가 김장·명절 밥상을 선보이는 ‘손맛할머니,’ 고된 농촌 생활을 지탱하는 삼형제의 제철 먹방 ‘먹두리’ 등이 도시 사람들과 MZ세대로부터 “힐링 된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암·당뇨처럼 영양 섭취에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난치병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소개하는 특수한 먹방도 있다. 암 환자들은 항암 부작용 등으로 섭식이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암 자체보다도 제대로 못 먹어 문제 될 때가 더 많다. 환자 먹방에선 자연 건강식을 만들어 맛있게 먹고, 환자가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아 비프 스테이크로 단백질을 보충하며 “잘 먹고 이겨내자”고 외친다. 입맛은, 이렇게 잘 살기 위해 돌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