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땅끝마을 아침 바다 정경 /강성곤 제공

전남 해남에 다녀왔다. 해남군 송호항 권역센터의 초청이다. 어촌 신활력 증진사업을 위한 해수부 산하 조직인데 문화 아카데미를 신설해 강연차 가게 되었다. 20여 년 전 아나운서 중참 시절 해남 출장길을 떠올렸다. 옥호가 옹달샘식당이었을 테다. 고봉밥에 두툼한 돼지고기가 듬뿍인 김치찌개를 잊지 못한다. 게다가 마침 숭어 철이라고 보리숭어회 한 접시를 찬으로 내놓는 데야 감격을 가누기 힘들었다. 남도의 손맛과 인심은 유별나다.

나주역까지 가는 SRT 열차에서 사실 무거운 마음이었다. 수강 대상이 송지중학교 학생 80명과 교사⸱학부모로 변경된 것. 주제도 ‘효과적인 말하기’에서 ‘인생을 좌우하는 바른 말 습관’으로 바뀌고 말이다. 강의하기가 가장 힘든 부류로 흔히 셋을 든다. 첫째가 중고생, 공무원이 그다음, 이어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 순이다. 이유는 미루어 짐작 가능할 터. 차창 밖 아름다운 풍광에도 스멀스멀 불안했던 이유다.

송지중학교. 해남의 13개 면 중 가장 남쪽, 땅끝마을을 품에 안은 곳. 한자로 송지(松旨)다. ‘소나무의 뜻’, 멋지다. 강연 시작. 중1, 2, 3 모두가 80명. 모습은 여느 도회지 학생들과 같은데 다른 게 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른다. 나 몰라라 자거나 줄기차게 떠들거나 괜스레 주눅 들거나 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이토록 순수하고 명랑하고 해맑다니. 보기 좋게 빗나간 예상은 뜻 모를 힘과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질문을 던지면 “저요, 저요”가 마구 나온다.

허를 찔러봤다. “자기 목소리가 좋다고 느끼는 사람 있어요?” 조용하다 싶더니 남학생 하나가 손을 번쩍 든다. “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 볼래요?” “제 목소리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놀라웠다.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응답은 처음이다. 낳고 길러준 부모에 대한 효심, 평소 자중자애(自重自愛)하는 소중한 마음이 녹아 있다. “목소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확하고 명료한 발음을 갈고 닦으면 목소리가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효과가 있거든요. 우리 한글 자음과 모음을 평소에 큰 소리로 자신감 있게 연습하면 좋겠어요.” 나의 준비된 해답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달려들어 팔짱 끼고 찍은 단체 사진을 끝으로 행복하게 매조지었다.

미황사의 일주문 현판 /강성곤 제공

늦은 점심상에 민어가 올라왔다. 주최 측의 호의와 배려. 처음 마주한 민어 부레는 궁극의 진물(珍物)이었다. 캐비아⸱트뤼프⸱푸아그라가 서양의 3대 진미라 했던가? ‘게, 물렀거라’ 하고 싶은 심정. 색⸱맛⸱식감의 독자성이 모종의 비의(秘義)를 부러 감춘 듯한 느낌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의 대화를 들었는지 말을 섞는다. “내 단짝의 딸아이가 아나운서인데요. 유도희라고.” “알다마다요.” 반가운 이름! 5년 전 신입사원 교육 때 웃는 얼굴, 시원한 발성, 붙임성 있는 태도의 그녀를 칭찬했었다. K대 정외과 출신의 재원이라는 말에 마침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던 학교 홍보팀에 전했고, 학보사⸱방송국이 그녀를 취재해 간 기억까지. 급기야 통화를 했다. “선배님, 해남 오실 줄 알았으면 광주서 내려갔을 텐데요. 점심이라도 꼭 모시고 싶었는데.” 말도 이쁘게 하는 그녀. 지금은 광주KBS의 대표 아나운서이자 뉴스앵커다. 사람의 인연은 각별하기만 하다.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다. 천년 고찰 미황사와 윤두서(1668~1715) 초상화를 보러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세월의 더께가 육박하는 108개 돌계단을 오르면 말간 얼굴에 음전한 여인을 닮은 절집, 미황사가 고개를 내민다. 위에는 이름마저 신비로운 달마산이 믿음직한 근위병인 양 도량을 보듬고 있다. 여기선 삼황(三黃), 세 가지 노랑이 깃든다고 한다. 눈부신 황금빛 불상, 미끈한 연황색 바윗돌, 그리고 해거름의 주황빛 저녁놀이다. 향문 주지스님은 말한다. “육지의 끝에 자리한 미황사에서 아무쪼록 ‘고통 끝, 절망 끝’을 이루시고요, 바다로 치면 우리 절이 출발 아니겠어요? ‘희망의 시작, 기쁨의 시작’을 안고 가시길.”

국보인 윤두서 그림은 참말로 가슴을 뒤흔들었다. 전신사조(傳神寫照). 인물의 외형뿐만 아니라 정신⸱인격⸱마음까지 담아냄을 일컫는다. 극사실적 표현을 위해 서수필(鼠鬚筆), 즉 쥐 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그렸다. 먹물이 끊기지 않고 길면서 탄력적인 선을 뽑아내기 위해서다. 이런 게 마스터피스가 아니고 무엇인가. 통유리를 뚫고 나올 듯한 안광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울분⸱자의식⸱카리스마가 꿈틀대는 이 명화 앞에서 고흐⸱뒤러⸱렘브란트 자화상이 무슨 대수랴. 푸른 비가 내린다는 녹우당(綠雨堂) 뜰을 거닐며 모처럼 흔연했다.

윤두서 초상화. 안광이 통유리를 뚫고 나올 것 같다. /강성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