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 후유증이 생기는 시기, 긴급 처방이 필요해 서울 도심으로 ‘리프레시 바캉스’를 떠난다. 종착역은 서울역. 여행 준비물은 교통 카드 한 장이면 충분하다. 승차와 하차, 출발과 도착을 위한 인파로 가득한 역사(驛舍)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서울역 뒤편. 아시아 대학생 청년 작가 미술 축제이자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인 ‘2024 아시아프(ASYAAF)’를 비롯해 눈이 시원해지는 전시, 볼거리가 반기고 있다. 이번엔 서울역發 ‘역캉스(역+바캉스)’다.
◇‘아시아프’ 여는 옛 극장
일제강점기 지식인을 그린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속 주인공 구보씨는 집을 나서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청계천 광통교를 지나 종로 ‘화신상점가’ 기웃거리다가 전차를 타고 ‘조선은행’ 앞에서 내려 ‘경성역(서울역)’ 대합실에 이른다. 군중 사이에서 고뇌하던 소설가 구보씨는 알았을까? 경성역 안팎이 이 여름 바캉스 명소가 될 줄을. 구보씨가 차마 보지 못한 서울역 뒷동네에 발을 들였다.
첫 번째 코스는 오래도록 ‘서울 서부역 동네’라 불려온 곳에서 대체 불가의 존재감을 뽐내는 ‘옛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이다. 올해 말 철거 예정인 이곳에선 8월 25일까지 아시아 최대 청년 미술 축제인 ‘2024 아시아프’가 열리고 있다.
옛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등은 원래 기무사 수송대 부지로 군 차고지와 차량 정비소로 사용돼 오다 2010년 등장한 공간이다. 머지않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극장 건물을 청년 작가들의 캔버스가 장식하고 있다.
입체와 평면, 해외 아티스트 작품을 선보이는 건물은 소극장이던 곳. 조명 등 무대 장치를 설치했을 골조가 그대로 노출된 천장 아래 탐험하듯 부스를 돌다 보면 극장 연습실 거울, 빛을 차단하는 암막 커튼 등 백스테이지의 숨은 공간들이 불쑥 나타난다. 35세 이하 청년 작가나 대학생·대학원생의 참신한 작품을 선보이는 ‘아시아프’ 부문, 36세 이상 작가들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히든 아티스트’ 부문 작품을 전시한 사무동 건물은 더욱 흥미롭다. ‘국장실’ ‘공연관리팀’이란 팻말이 그대로 달린 안쪽 사무실에도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탕비실도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다. 낡은 싱크대마저 설치 작품처럼 보인다. ‘예술로 공간을 재생한다’는 아시아프 정신을 잇는 데 의미를 뒀다.
◇‘10만원 소품전’, 유망 작가 발굴
올해로 17회를 맞은 2024 아시아프는 지금까지 아시아 전역의 청년 작가 1만여 명에게 전시 기회를 준 미술 축제이자 ‘K아트’를 이끌어갈 미래의 거장을 육성하는 행사다. 수수료 없이 작품 판매 수익 전액을 작가에게 지급해 성장을 돕고, 미술 애호가에겐 합리적 가격으로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을 소장할 기회. 올해는 아시아 8국 작가 500명의 작품 1200점을 선보인다.
‘유망 작가 발굴’은 이미 시작됐다. ‘10만원 소품전’에 나온 1부 작품들은 일찌감치 ‘완판’됐다. 10만원 소품전은 ‘Small & Special’을 뜻하는 ‘S’ 스티커가 붙은 작은 작품을 한 점당 10만원에 소장할 기회다. 13일 시작할 2부에서도 10만원 소품전을 진행하니 서두를 일이다. 시원한 전시장 부스마다 학생 자원봉사자 ‘SAM(Student Art Manager)’이 배치돼 간략한 작품 설명과 구매를 돕는다. 작가에게 직접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도슨트 투어 ‘내.작.소(내 작품을 소개합니다)’, 최애 작품에 투표만 해도 소정의 기념 선물을 받아 갈 수 있는 이벤트도 진행한다.
관람객은 방학을 맞은 어린아이들부터 청장년·노년층까지 다양하다. “중학교 여름방학 때인 2008년 1회 아시아프부터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찾고 있다”는 관람객 이가람(31)씨는 “올해는 서울역 근처라 접근성이 최고”라며 “재미있고 기발한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올 아시아프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2024 대한민국 미술 축제’에도 동참한다. 키아프·프리즈 서울·광주비엔날레·부산비엔날레 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미술 행사로 선정됐다. 현장 매표소에서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통합 입장권을 제시한 관람객에겐 관람료 2000원 할인 혜택을 준다.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화~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 가능하며, 관람료는 성인 9000원, 어린이 및 청소년 5000원. 주차는 최대 30대, 2시간까지 무료 이용 가능하다.
◇서울역 공간 투어부터 실감 영상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을 시작으로 걸어서 10분 안팎에 도심 바캉스를 즐길 만한 문화 충전소들이 모여 있다. 신호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역사로 오갈 수 있다. 옛 서울역사를 복원한 아트플랫폼 ‘문화역서울284′에선 ‘reSOUND: 울림, 그 너머’(~8월 25일)가 기다린다. 뉴욕 타임스스퀘어를 미디어아트 폭포로 장식해 화제가 됐던 ‘디스트릭트’의 창립 20주년 기념 특별전.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에서 신청한 관람객이 우선 입장하나 당일 현장 신청 후 입장도 가능하다. 단, 인원 제한이 있어 줄을 설 각오를 해야 한다.
중앙 홀로 들어서면 대형 미디어 월에서 광활한 바다의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친다. 압도적 몰입형 미디어 설치 작품명은 ‘오션’. 금세 휩쓸려 갈 것만 같은 착시 현상에 관람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온다. 대합실의 ‘카타르시스’에선 곤충의 시선으로 원시림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인조 모피를 쓰다듬으면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택타일 오케스트라’도 재미있다. 옛 연회장이던 2층 ‘그릴’은 극장으로 변신해 미술사의 흐름을 퍼포먼스로 쉽게 표현한 영상을 상영한다. 무료 관람.
간 김에 문화역서울284 공간 투어 ‘100년의 시간 여행’도 해볼 만하다. 늘 가까이 있어 잘 몰랐던 옛 서울역사를 전문 해설사와 함께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다. 경성역으로 지어질 당시의 시대상과 복원 건축에 숨어 있는 비밀 등을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투어 소요 시간은 50분 정도다.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에서 예약 후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
◇폐주차램프에서 만나는 설치 예술
문화역서울284를 나서 옥상정원으로 올라가 볼 차례다. 복합 공간인 서울역사 옆 ‘롯데마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리면 찾기 쉽다. ‘서울로7017′과도 연결된 옥상정원에선 서울역을 오가는 분주한 인파에서 한걸음 떨어져 조용히 쉴 수 있다. 문화역서울284의 돔 구조물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다만 한낮엔 그늘이 없다.
옥상정원에서 이어가 볼 곳은 ‘도킹서울’이다. 옛 서울역 주차 램프를 설치 미술관처럼 꾸몄다. 폐쇄된 주차 램프에 들어서면 공공 미술과 ‘도킹(docking·우주 공간에서 다른 비행체와 우주선이 결합하는 것)’ 한다. 나선형 램프 하행 방향으로 내려가면 반응형 미디어아트 작품 ‘관측지점’이 나온다. 잠수정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보이는 화면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주차 램프 중정에 해당하는 중앙의 파란색 설치 작품인 ‘깊은 표면’과 ‘푸른 별’은 도킹서울의 대표 포토존이다. 다시 상행 방향으로 올라오면 시민이 참여한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무료 개방.
◇서소문성지역사공원, 손기정기념관도
아시아프를 핑계로 서울역 뒤편에 발걸음했으니, 서계동·청파동·만리동·중림동 등 골목 탐험도 해볼 만하다. 재개발로 아파트 숲이 들어선 지 오래지만 주택가 골목 샛길을 걷다 보면 옛 서울의 풍경이 꽤 남아 있다. ‘중림동 성요셉 거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이다. 2021년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1971년 준공된 ‘성요셉 아파트’는 주상 복합 구조로 1층엔 노포인 방앗간과 아기자기한 카페, 꽃집이 어깨를 나란히 해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일요일에만 문을 여는 복합 문화 공간 ‘중림창고’와 마주하고 있다. 근대 건축 투어 코스에 빠지지 않는 중림동 약현성당은 조금 언덕에 있지만, 지나치면 후회할 지 모른다.
골목 탐험을 하다가 더우면 실내 공간인 박물관, 기념관을 코스에 추가하는 것도 방법이다. 성요셉 아파트에서 ‘서소문역사공원’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걸어서 5분 거리다. 성지 순례 코스뿐 아니라 사진 촬영 명소로 조용히 소문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관람 동선이 꽤 짜임새 있다. ‘순교자 현양탑’을 시작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순교자의 길’ ‘빛의 광장’ ‘하늘광장’ 등을 차례로 지나 ‘하늘길’ 앞에 서면 성스러움이 절정에 이른다. 미디어아트가 관람객 발걸음에 길을 열어주고, 자연광이 스며드는 좁다란 길은 종교와 관계없이 관람객 모두를 성자로 예우해 주는 것 같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무료 관람.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린 이 여름, 마지막 가볼 곳은 베를린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를 기리는 ‘손기정기념관’이다. 만리동 주택가와 아파트 사이 자리한 손기정기념관은 손기정 선수가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 후 받아 옮겨 심었던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를 비롯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훼손 사건 등 일대기를 사진, 기사, 영상 자료로 살펴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과 AR로 만나는 손기정 이야기, 손기정이 다니던 학급을 재현한 교실도 볼거리.
‘전시관 트랙’을 돌아 기념관 밖으로 나서니 해는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누군가는 달리기 위해, 작품을 걸기 위해 이 뜨거운 태양 아래 남몰래 흘렸을 땀을 생각하니 참을 만했다. 기념관 들어갈 땐 놓쳤던 문구도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길이었고, 모든 곳을 달렸다. 오로지 달릴 뿐이었다.’
[ 서울역 뒷동네에서 먹는 ‘영덕 물회’ 맛은? ]
‘2024 아시아프’ 주변 가성비 맛집
‘청년 작가의, 청년 작가에 의한, 청년 작가를 위한’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 ‘2024 아시아프’를 여는 옛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10분 안팎에 있는 ‘10분 컷 가성비 맛집’을 찾았다. 맛집 추천엔 서울역 뒤편에 본사를 두어 일대 사정에 밝고, 여행에도 일가견이 있는 ‘코레일관광개발’ 직원들이 함께했다.
불볕더위에 온몸을 식혀줄 냉요리가 간절하다면 ‘영덕물회막회’의 영덕 물회를 맛보시라. 아시아프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인데, 정문에서 나와 왼쪽으로 직진하면 된다. ‘충남호프’ 등 노포가 이어진 길 끄트머리쯤에, 조그만 간판을 단 식당은 점심때와 가까워질수록 대기 줄이 길어진다. 영덕 물회가 단돈 1만원(소)부터 시작한다. 중은 1만5000원, 대는 2만원이다. ‘소’가 적을 것 같아 중을 주문하면 회 등 건더기를 건져 먹다 지칠지도 모른다. 식사는 밥이나 면을 주문할 수 있다. 면양도 만만치않다. 반찬으로 달걀부침과 콩나물, 진미채무침 등을 주니 아침 식사 거르고 간 이들에겐 ‘아점’(아침 겸 점심)이다.
서울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서계동 골목 안쪽에 있는 ‘서울역철도떡볶이’는 “서울역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맛있다”는 평이 자자하다. ‘밀떡파’들에게 더 인기다. 매콤한 양념이 말캉한 밀떡과의 조합이 좋다. ‘떡튀순’(1인분 9000원)을 주문하면 떡과 튀김, 순대가 한 접시에 나온다. ‘달인’으로 방송에 출연하며 전국구 맛집이 됐다.
“만리동 ‘유즈라멘 본점’은 서울역에서 라멘의 본고장 일본으로 순간 이동시키는 라멘 전문점”이라고 추천했다. 코레일관광개발 직원들뿐 아니라 일대 직장인들이 점심 때 ‘오픈 런’ 하는 맛집 중 하나. 소금으로 맛을 낸 유즈시오라멘은 국물 맛이 깔끔하다. 매운유즈쇼유라멘은 ‘해장용’으로도 즐겨 찾는다고. 면은 리필 가능하다. ‘오한수우육면가’는 쌀국수가 생각날 때, 파스타와 브런치는 ‘바비’, 포케에 와인 한잔하고 싶을 때 ‘빈공간’ 등도 추천 목록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