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문화재단 ‘시민 작가 양성 프로젝트’에 참여해 4년 만에 모두 이렇게 책을 펴냈다. /최여정 제공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함께 점심 식사 해요.” 다섯 명이 함께 있는 카톡방에 “축하해요!” “드디어!” “책 표지 너무 예뻐요!” 메시지가 대롱대롱 달린다. 그림과 글을 더한 에세이답게 책 표지 역시 작가의 그림이다. 저 멀리 설산을 배경으로 이제 막 새 옷을 갈아입은 듯 연둣빛 언덕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는 수채화. 짙은 초록 이파리 펼친 나무 숲 사이로 작고 소박한 농가도 한 채 숨겨져 있다. 흰 눈과 초록잎이라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색의 조화는 지난주에 다녀온 스위스 출장길의 버스 차창 밖으로 그림처럼 펼쳐졌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카톡방에 있는 다섯 명 중 가장 마지막 출간이었지만 가장 기뻤다. “멘토님 덕분이에요. 감사해요”라는 말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멘토가 뭐예요. 여정씨라고 부르세요. 이제 우리 모두 작가인걸요.”

4년 전, 고양문화재단의 ‘시민 작가 양성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작가를 꿈꾸는 시민들을 지원하는 사업. ‘간직해 오기만 했던 나만의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고 싶은 고양 시민’이라면 누구나 지원 가능했다. 기획안 심사와 면접을 거쳐 선발되면 고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와 연결된다. 주어진 5개월간 책을 출간하는 것을 목표로 작가의 멘토링이 이어지는데, 만나는 장소는 고양시 동네 곳곳 작은 독립 서점. 그야말로 시민, 작가, 독립 서점이라는 점을 이어 책 한 권이 완성되는 사업이었다. 나는 책을 먼저 몇 권 냈다는 이유로 멘토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네 작가 지망생을 만나게 되었다.

4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도 제각각인 네 여성은 관심 있는 주제와 쓰고 싶은 글도 서로 달랐다. 먼저 여덟 살, 네 살 형제를 키우는 젊은 엄마. 공연 기획을 하다가 일을 그만두고 전업 육아를 택한 그녀는 아이들의 성장을 기록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런 육아 에세이는 이미 너무 많으니 다른 기획을 해보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격주 화요일 저녁마다 만나서 글을 쓰는 대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글을 쓰는 데 멘토링이라니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말이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들어주는 것, 그 이야기를 글로 꾸준히 써나갈 수 있도록 읽고 응원해 주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끔 열정적으로 일하던 자신이 그립기도 하지만, 기적같이 커 나가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다고 했다. 목련 송이처럼 작고 도톰한 아기 입술이 움직여서 단어가 될 때마다 귀 기울이게 된다는 말에 아기의 단어를 모아 ‘아기 소리 백과사전’을 써보자고 했다.

사진작가로서 이미 소규모 전시도 몇 번 연 경험이 있는 또 다른 중년 여성. 그녀는 고양시의 사라지는 장소를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애정을 주는 장소는 문방구. 바쁜 엄마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온라인 새벽 배송 탓에 사라져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문방구들이 그녀의 카메라 안에 가득했다. 한때는 교문 앞에 줄지어 상권을 이룰 정도로 문방구가 번성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하굣길 문방구는 그야말로 참새 방앗간. 온갖 군것질거리가 가득한 문방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한입 쪽 빨아먹으면 감질맛 나는 아폴로며, 연통 난로에 올려서 살짝 구워 먹으면 쫀득쫀득한 쫀득이도 좋아했지만 그중 제일은 갈색 잼이 쭉 입안에 고이던 호박 꿀맛나였다. “그럼 오래된 문방구 사진과 거기에 어울리는 글을 넣으면 되겠어요!” 나는 신이 나서 외쳤다.

첫 만남 때 이미 완성된 단편소설 몇 편을 건넨 분도 있었다. 고등학생, 중학생 남매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청소년 소설을 쓰고 있었다. 2주에 한 편씩 완성되는 놀라운 창작열에 감탄하며 성실한 첫 번째 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이번에 출간된 책의 작가다. 일흔 가까운 나이로 가장 연장자인 그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퇴직한 뒤 비로소 자기를 찾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장성한 남매는 출가하고, 긴 인생의 동지 같았던 다정한 남편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만난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가 다시 그림으로 옮겨 그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 일. 단정한 드로잉 선과 스며들며 어우러지는 색감의 투명한 수채화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똑 닮았다.

4년이 지난 후 우리 모두는 작가가 되었다. 각자 숨겨두었던 이야기가 책 한 권이 되었다. 누구도 책을 읽지 않는데 누구나 책을 쓰고 싶어하는 세상이다. 책을 출간할 방법이 훨씬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책 한 권을 꿰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한자 冊(책)은 죽간을 끈으로 엮어놓은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다. 생각과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모으고 묶어야 비로소 책이 된다. 각자가 쓴 책 다섯 권을 찾아 펼쳐 놓고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 “사람의 인생처럼 책도 저마다 운명을 타고난다지요. 작가의 손을 떠난 책은 이제 긴 여행을 떠납니다. 그 여정 중에 많은 독자를 만나기를. 모두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