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와인을 마셨다. 고기와 와인을 마신 게 아니라 ‘고기’라는 이름의 피노누아를. 고기 와인을 가져오신 분이 고기와 먹는 와인이라는 설이 있다는 농담을 했지만 고기 와인은 고기가 가장 어울리는 와인은 아니었다. 스테이크나 불에 구운 고기처럼 테스토스테론을 뿜어내는 강한 고기 말이다. 그보다 좀 더 섬세하고 자기 주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음식과 마셔야 할 것 같았다. 투명함이 감도는 가넷빛과 제비꽃과 장미 향을 맡으며 나는 “본 로마네 같은데요?”라고 했는데 맛마저도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배우 커트 러셀이 자신의 어릴 적 별칭 고기(Gogi) 를 따서 만든 '고기 와인'. /GOGI WINES

Gogi라고 쓴다. 발음 말고도 이야깃거리가 있는 와인이다. 배우 커트 러셀이 만든 와인이라서. 나는 그래서 Gogi가 무슨 뜻인지 알아내야 했다. 어째서 Gogi인지 알 수 없었고,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걸 알아내지 못하면 병이 걸린다. 그러다 마침내 알게 되었다. 미국 쇼 프로그램에 나온 커트 러셀이 자신의 미들 네임의 발음이 어려워 어린 시절 Gogi라고 불렸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의 미들 네임은 Vogel인데 이게 발음하지 못할 정도인가 싶지만 알게 되어서 매우 기뻤다. 그의 누나들은 그를 Gogi, Goge, Gogo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강아지, 강지, 강쥐처럼 누군가를 귀여워하며 부르는 호칭이었던 것이다.

고기 와인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커트 러셀이 궁금해진 나는 얼마 후 그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중에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2007년작 ‘데스프루프’를 찾아보았다. Death-Proof다. ‘죽음으로부터 안전한’이거나 ‘죽음을 막는’이라는 뜻의 이 영화를. 워터프루프는 방수, 불릿프루프(bullet-proof)는 방탄이라면 데스프루프는 방사(防死)라고 해야 할까. 영화에서 그는 데스프루프라고 보닛에 쓰인 차를 타고 다니며 아름다운 여자들을 차로 살해하는 역할이다. 요즘 영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테스토스테론이 넘쳐나는 마초를 연기하는 그를 보며 저런 남자들이 추앙받는 시대가 있었다는 게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 그는 많이 우스운 마초이긴 하지만. 비뚤어진 욕망을 실현한 대가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그를 보며 ‘본인만 데스프루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화를 보고 나서 고기 와인 홈페이지에 갔다가 ‘데스프루프’ 때문에 고기 와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샌타바버라 카운티 북부에 있는 샌타리타 힐스(Santa Rita Hills)에서 타란티노의 ‘데스프루프’를 촬영하는 동안 내가 그토록 사랑한 부르고뉴에 필적할 만한 와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그는 쓰고 있었다. 정리해 보자면 이런 이야기다. 우연히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된 장소에서 아마 피노누아였을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와인을 맛보고 이런 밭과 기후 조건을 가진 곳에서라면 자기도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와인과의 사랑의 여정을 밝히고 있는 ‘커트 레터’에서 유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꿈꾸던 와인을 만들게 되었다며 또 다른 ‘라 타슈’를 만들겠다고 한 거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이름난 로마네콩티가 부르고뉴 와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이라면 그다음이 라 타슈(La Tache)다. 본 로마네의 심장부에 로마네콩티가, 로마네콩티의 위로 리시부르가, 아래로 라 타슈가 있다. 그리고 로마네콩티의 생산자가 라 타슈의 생산자라서, 라 타슈를 ‘또 다른 로마네콩티’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커트 러셀의 이 말, ‘또 다른 라 타슈’라는 말은 ‘또 다른 로마네콩티’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머리숱이 많고 더부룩해서 그럴 텐데 스스로를 ‘피노 푸들’이라고 칭하는 커트 러셀이 피노누아에 미친 강아지라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그러므로 또 다른 라 타슈를 만들겠다는 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피노 푸들의 진심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