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아씨는 1984년 삼성그룹 계열사 제일기획에 입사해 ‘여성 최초’ 기록을 여러 번 세우며 부사장까지 올랐다. 최인아 책방에서 만난 그는 “나도 한때 ‘미스 최’로 불리며 부당한 대우에 침묵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면서 “지금의 여성들도 후배들을 위해 뭐든 애쓰다 보면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1991년 TV 광고 카피다. 지금은 특별한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저 문장 앞에서 당시 많은 여성이 울고 웃었다. 이 카피를 만든 최인아(63)씨도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미스 최’로 불리며 커피를 타고 책상을 닦아야 했다.

“꾹꾹 눌러담은 제 이야기였죠. 그때는 여자 직장인뿐 아니라 프로란 개념도 없었어요. 맺힌 마음에서 나온 거예요.”

최인아씨는 1984년 제일기획에 공채로 입사해 상무, 전무, 부사장을 거치며 ‘여성 최초’란 타이틀을 여러 번 갈아치웠다. 2012년 29년 다닌 회사에 사표를 낸 뒤엔 책방 마님으로 살아가고 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서울 선릉에 있는 ‘최인아책방’에서 그를 만났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있는 차별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고 나아질 거라고요. 시대가 알아서 바뀐 것도 있지만 여성 선배들이 애를 쓴 뭔가가 있었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고마운 줄 알아라’라는 뜻이냐? 그거 아니고요. 지금 분투하는 후배가 우리보다 나은 시대에 살길 원한다면 우리도 애써야 하지 않겠어요?” 최인아씨는 ‘그냥 대충 살아도 된다’는 요즘 세태에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애쓰는 게 왜 나쁜가요?”

"카피라이터는 잃어버린 것도 없이 늘 뭔가를 찾는 사람이에요. 아이디어를 찾는 직업이죠."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애쓰고 또 애써라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할 땐 신문사 정치부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시험에서 미끄러지고 우연찮게 광고 회사에 들어갔다. 신입 사원 50명 중 4명이 여자였다. 1년 일하고 기자 시험을 봤지만 또 낙방. 그즈음 광고 일에 슬슬 재미가 붙었다. 여자란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 분개하기도 했지만 프로로 보이고 싶어 참았다. 그렇게 탄생한 게 여성복 베스띠벨리의 광고 카피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다.

-왜 광고 회사였나요.

“제일기획 신입 사원 공고가 떴는데 여자도 시험을 볼 수 있고 전공 제한도 없다는 거예요. 직종이 ‘카피라이터’였는데 라이터(writer)가 붙으니 뭘 쓰나 보다 하고 시험을 본 거죠.”

-입사하고 ‘미스 최’라고 불렸다고요?

“남자 동기들에게는 ‘씨’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불렸어요.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물 떠놓고 책상 닦는 거였고요. 선배가 ‘이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했어요. 저는 ‘내가 막내라서 하는 일이고 내년에 후배가 들어오면 남자라도 그 일을 물려주리라’ 생각했죠.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어요.”

-왜요?

“그때는 여성이 ‘소수민족’이었어요. 수도 적고 힘도 미약했죠. 남자를 적으로 돌리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했죠. 내 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믿었고요. 시간을 길게 잡고 기다렸어요. 어느 날 ‘미스 최’가 아닌 ‘최인아씨’ ‘최 대리’가 됐어요. 시대의 기운이 달라졌죠.”

-말은 담담하게 해도 힘들었을 거 같아요.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어요. 집에서도 ‘넌 딸이니까’란 소리는 안 듣고 자랐거든요. 그런데 현실은 달랐어요. 그럼 나는 무릎 꿇어야 하나? 그러긴 싫었어요. 그게 입사 8년 차에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로 나온 거예요. 위에선 얼토당토않고 너무 어렵다고 반대했는데 저는 우겼어요. 클라이언트가 그걸 뽑았고요.”

-프로가 된다는 게 뭘까요?

“그들이 나를 인정하려면 무엇보다 능력을 인정받아야 해요. 나를 쓸 수밖에 없도록 내 역량을 키워야죠.”

-열심히 노력하라는 뜻이죠?

“애쓴 것은 사라지지 않아요. 이만큼 시간을 들였는데 결과가 안 나왔다, 그럼 의미가 없냐? 그렇진 않아요. 언제든 튀어나옵니다. 자신의 과거를 믿어야 발을 내디딜 때 확신을 가질 수 있어요. 연기의 신으로 불리는 김혜자 선생님도 항상 불안하대요. 작품을 시작할 때 ‘내가 끝까지 잘할 수 있을까’ 하면서요. 그런데 ‘저번에도 잘했잖아?’ 한대요. 해봐야 믿음이 생기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애써봤나요?

“퇴근을 해도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질 못했어요. 늘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아요. 집에서도 눕질 않았어요. 옷도 벗지 않고 책상 앞에 그대로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죠. 그런 세월을 보냈어요. 새벽 6시 30분 출근에 주말도 없었죠. 누가 시킨 게 아니고 그냥 제가 그렇게 한 거예요. 잘하고 싶었거든요.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누가 묻더라고요. 그게 자존을 지키는 방식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요즘은 꼰대란 소리를 들어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요즘 흐름은 건강하지 않아요. 경영자나 회사 입장이 아니고 개개인의 입장에서 봐도 그런 태도가 유익하지 않아요. 나는 애쓰고 싶은데 주변이 그러지 않아서 고민인 사람도 많고요. 눈치 보지 말고 계속 애쓰세요!”

최인아씨가 1991년 제일기획 시절 뽑은 TV 광고 카피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선배의 위대함

여성이라서 받는 부당한 대우에 맞서지 않은 건 아니다. 최인아씨가 선배와 후배에게 차갑다고 평가받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할 말은 꼭 했다. 입사 첫해 회사 대표에게 “남자 이상 가는 좋은 카피를 쓰라고 하면서 대우는 왜 다른 거냐”고 따진 일화가 회자된다. 이 도발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심하고 후진 시대였어요. 미스 최로 불리고 책상을 닦는 건 괜찮았지만 능력과 관련한 잘못된 처우에 대해선 싸웠어요.”

-80년대엔 남녀 월급 차이가 컸나요.

“군필은 그렇다 쳐도 군 면제인 남자 동기들도 저보다 월급이 많았죠. 그러다 호봉을 똑같이 해준다고 했는데 월급(20만원대)이 1800원 오르더라고요. 대리 진급도 남자는 4년, 여자는 7년 걸렸어요.”

-항의했나요?

“회사는 늘 ‘선례가 없다’고만 했죠. 그러다 사장님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어요. 동기들과 작전까지 짰는데 정작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사장님이 ‘자, 할 얘기 없나? 마칠까?’ 했는데 제가 벌떡 일어났죠. 너무 간절했어요.”

-무슨 얘길 했나요?

“당돌하게 월급 얘기를 했어요. 지금도 사장 얼굴이 눈에 선해요. ‘요것 봐라’ 하면서 한참 듣고 있었죠. 그러다 웃으며 ‘야, 해줘. 틀린 말 아니잖아’ 했죠. 시스템은 못 바꿨지만 월급 차이는 메꿔줬어요. 그런데 보너스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또 뛰어 올라가고, 그런 짓을 많이 했어요.”

-확 달라지진 않았군요.

“첫 진급 때 입사 동기들은 다 대리를 달았는데 저만 안 됐죠. 그 기분은 모를 거예요. 사무실에 종이로 방이 붙던 시절이었는데 내 이름만 없었어요. 내가 옳다고 매일 싸웠는데 굉장히 바보 같았죠. 움츠러들었어요.”

-그래서요?

“그런데 그 다음 해 대리가 됐어요. 원래는 7년인데 5년 만에. 그 다음 해는 하나 아래 후배가 대리가 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남녀 진급도 똑같아졌어요.”

-잘 견뎠네요.

“개인이 불합리한 시스템과 물론 싸워야 하지만, 오랜 관행을 깨는 건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에요. 씨앗이 땅을 뚫고 떡잎을 밀어 올리듯 개인의 힘이 분명 필요합니다. 맨 앞에 선 사람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고요. 박찬호, 박세리가 그래서 위대한 겁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 거니까요.”

제일기획 부사장 시절 광고 촬영 현장. 뒷모습이 최인아씨다. 29년을 바쁘게 살아와 젊은 시절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없다고 했다. /최인아 제공

◇잘나갔지만 고민의 연속이었다

이력을 보면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삼성카드)’ ‘빨간색이 좋아져요(홍삼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안할 자유(클럽메드)’ 등을 써내 명성을 떨치면서도 사회 생활은 고민의 연속이었다. 몇 개의 광고 카피로 이름을 알린 9년 차 때는 사표도 냈다. 임원이 되기 직전까지도 “이 일이 과연 내게 맞는가”에 대한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가장 잘나갈 때 회사를 그만뒀다고요?

“제가 받는 평가가 과한 것 같았어요. ‘사기꾼 증후군’이라고 하죠. 흔히 여자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제 아이디어가 채택되고 회의실에서 나올 때 ‘나한테 또 속아 넘어갔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과연 밖에 나가서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지 검증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시 제일기획으로 돌아갔습니다.

“외국계 회사에 가서 2주 만에 때려치웠어요. 잘못된 선택이었죠. 본의 아니게 프리랜서 카피라이터가 됐어요. 월급은 두 배 이상 많았지만 이것도 아니었어요.”

-왜요?

“내 능력이 어디에 있을 때 발휘되고 가치가 있는지 보이더라고요. 이 일을 계속하려면 팀이 필요했고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야 했어요. 이게 다 제일기획에 있었죠. 바깥공기가 저를 정신 차리게 했습니다. 9개월 만에 돌아갔어요.”

-회사가 다시 받아줬네요.

“그때 회사가 여성팀을 만들었어요. 소수라서 능력 발휘가 안 된다, 윽박지르는 남자들 사이에서 소리가 안 난다 해서요. 제가 그 팀의 장을 맡았어요. 운이 좋았죠. 저를 찾길래 ‘네’ 하고 바로 갔어요. 회사란 울타리가 든든하게 느껴졌어요.”

-그게 조직의 힘인가요?

“MZ에겐 또 꼰대란 소리를 듣겠죠. 퇴직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회사에 애틋한 마음이 있습니다. 80년대엔 사회가 너무 후져서 일하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때 스물셋 여대생인 저를 뽑아줬잖아요. 그 사실만으로도 눈물나게 고마워요. 입사해선 괴롭기도 했지만 ‘그 세월 덕분에 내가 있잖아’ 합니다.”

-재입사 후엔 어땠나요?

“여전히 마뜩지 않았어요. 이 일이 매력 있는 남자이긴 한데 썩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죠. 내가 하는 일이 그럴듯하고 의미가 있었으면 하는데, 그 결핍이 도무지 채워지질 않았어요. 그렇게 입사 15년 차까지 회사에 한 발 담그고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하면서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녔죠.”

-뜻밖이네요.

“제 일과 화해하는 데 매우 긴 시간이 걸렸어요. 이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어요. 그걸 찾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죠. 하기 싫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 인간이 이렇게 오래 이 일을 한 것은 결국 ‘이 일이 내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받아들였습니다.”

-16년 만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임원이 됐어요.

“임원을 달고도 ‘아싸. 나 됐다’는 전혀 아니었어요. 취하지 않았지요. ‘이쯤 되면 여자 임원이 있어야 회사에도 유리하다’란 분위기가 있었어요. ‘내가 남자였어도 나를 시켰을까?’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궁금해서 인사팀에 물어봤어요. 저는 내가 이 자리에 앉는 게 합당한가가 중요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때 ‘저 여자 정도는 할 만해’란 평이 꽤 있었다고 들었어요. 승진이 안 된 남자 동료가 열받아 그만두기도 했지만요.”

-부사장이 되고는 3년 만에 관뒀어요.

“저는 늘 ‘이 일을 언제까지 할 거니’ ‘그다음엔 어떻게 살 거니’란 질문을 끊임없이 했어요. 어느 날 영국의 한 교육부 장관이 직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무능해서 물러난다’고 말한 걸 신문 기사에서 봤어요. 너무 근사해보였죠. 잘리기 전에 스스로 그만두면서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이 있을까 생각했어요. 끝까지 애써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죠. 그걸 오려서 벽에 붙여놓고 나도 그러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사표를 낸 그해 봄에 신호가 온 거예요.”

-여성 최초 사장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조직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큰 원인 중 하나가 그 자리가 원하는 역량과 앉아 있는 사람 역량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래서 결정이 어렵지 않았어요. 나를 칭찬한다면 분별력이 있다는 거예요. 분수를 알고 자족할 줄 아는 것. 저건 너무 과해,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생각을 할 줄 아니까 멈출 줄 알았어요.”

-너무 많이 고민하면서 사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피곤했어요. 두통도 달고 살았고요. 그래도 그랬기 때문에 별로 실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카피라이터로 명성을 떨친 최인아씨는 승승장구했을 것 같지만 9년 차에 사표를 낸 적이 있다. 그는 “종종 ‘이 길이 맞는가’ 자문하곤 했다”며 “힘들었지만 그런 세월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두 번째 커리어, 책방 마님

회사를 그만두고 1~2년은 괜찮은 삶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단단하게 고민하고 그만둔 건데 왜 이러지, 했죠. 일하지 않는 내가 기껍지 않은 거였어요. 이 마음의 정체를 찾다 보니 ‘다시 세상에 쓰이고 싶다’에 도달했죠.” 최인아씨는 2016년 책방을 열었다.

-왜 책방이었나요?

“참 모를 일인 것 같아요.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무렵,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책을 좀 읽을까’ 방법을 찾아달라는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어요. ‘이건 우리가 직접 해보면 어때’ 해서 동업자와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세상에 쓰이고 싶었어요. 의미 있게. 저는 텍스트를 마주했을 때 제일 즐거워하더라고요.”

-’최인아책방’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왔나요?

“저는 ‘선배의 책방’으로 하고 싶었어요. 동업자는 ‘너무 교만한 것 아니냐. 아직 50대 중반인 우리에게도 선배가 얼마나 많은데’라면서 반대했죠. 제 인지도를 활용하자고 해서 처음엔 싫었는데 받아들였죠. 책방은 노래방, 찜질방처럼 노래만, 찜질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좀 더 깊이 만나는 느낌을 들게 하고 싶었어요.”

-다들 말렸다는데 망하진 않았네요.

“돈을 벌려고 했다면 책방을 안 했겠죠. 순항했어요. 적자가 계속 난다면 지속 가능하지 않죠. 가치를 제공해 수익이 났어요. 저희가 가진 자원으로 기업 프로그램도 맡아서 하고요.”

-코로나 때는요?

“코로나 걸려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첫마디가 ‘견디세요’였어요. 그 말처럼 견뎠죠, 뭐.”

최인아책방 대표/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진심이 꼰대를 이긴다

최인아씨는 미혼이다. “결혼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거죠. 팔자대로 살았구나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결혼은 안 할 거냐고 물었다. “참 어려워요. 그런데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하하. 후회한다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예요. 더 지혜롭고 현명했다면, 잠을 좀 덜 자야 했겠지만 또 다른 행복이 있었을 것 같아요.”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

“저는 집 앞 미장원에 다녀요. 그런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헤어스타일이 예쁘게 된 친구를 보면 어딘지 알아두고 메모를 하죠. 그래도 또 집 앞 미장원에 가요. 그게 제 우선순위가 아닌 거예요. 제 에너지를 그런 것에 쓰지 않죠. 마찬가지로 결혼을 안 해야지 결심한 적은 없어요.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뿐이에요.”

-작년에 낸 책이 7만부나 팔렸어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란 책이에요. 새로 생각해서 쓴 게 아니라 30년간 일하면서 고여 있던 것을 그냥 출력한 거예요.”

-출판사와 책 계약을 하고 7년 만에 냈다면서요.

“내가 꼰대인가 하면서 자기 검열을 세게 했어요. 요즘 인기 있는 ‘대충 살아라’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얘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얘기여서요. 걱정을 했는데 한 후배가 그래요. 진심이 꼰대를 이길 거라고. 제가 꼰대란 얘기 같은데, 제 말이 듣기 싫은 잔소리는 아니라서 다행이었어요.”

-많은 독자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열심히 산 사람들에게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얘기해준 것 같아요. ‘이게 왜 슬픈 소설도 아닌데 눈물이 날까요’란 30~40대 독자가 많았어요.”

-두 번째 은퇴도 계획하고 있나요?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줄고 있어요. 귀중하게 써야죠. 앞으로는 글을 쓰면서 살고 싶어요.”

최인아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글짓기로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그때 장면이 아직도 뚜렷해요. 자리에 앉으면서 ‘뭔가 쓰는 사람이 되겠구나’라는 예감이 들었죠. 또래들이 장래희망에 ‘현모양처’라고 쓸 때인데 저는 소설가, 대학교수, 기자를 썼어요. 하고 싶은 일은 몇 차례 바뀌었지만, 내 생각을 말하거나 쓴다는 건 똑같았어요. 근 30년을 해온 제 일도 쓰는 일이었고요.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무튼주말>최인아책방 최인아대표(아무튼주말 게재 전 사용금지)-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