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함을 표방했건만, 이렇게 말 많은 색(色)이라니. 바로 베이지(beige) 이야기다.
베이지는 엷은 황갈색, 옅은 회색에 노랑이 섞인 색이다. ‘표백도 염색도 하지 않은 천연 양모’를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이름. 자연에서 흔히 보는 오묘한 중간색이다. 색조와 명도에 따라 크림색, 아이보리(상아색), 오프화이트, 모래색, 오트밀색, 낙타색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눈에 잘 안 띄고 아무 데나 어울린다고? 온갖 색이 아우성치는 시대에 사람들이 굳이 베이지를 내세울 때는 내심 목적이 분명한 경우가 많다. 부드러움과 따뜻함, 안정과 평온, 중립과 중도, 성실함, 지성, 고상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때론 의도와 달리 역풍이 불기도 한다.
“누구도 해치지 않아요”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짙은 양복에 당을 상징하는 빨강이나 파랑 등의 넥타이를 매거나 같은 색 점퍼를 걸치는 게 공식이다. 그런데 4월 총선을 앞두고 주요 양당 대표가 베이지색 옷을 입는 경우가 눈에 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밝은 회갈색에 가까운 베이지 코트와 재킷, 아이보리 터틀넥, 흰 티셔츠 등을 즐겨 입는다. 2022년 대선 때부터다. 요즘도 시민과 편하게 만나는 일정이나, 본인의 범죄 혐의에 관한 재판에 출석하는 날, ‘비명횡사 공천’ 등 당내 갈등이 불거질 때도 베이지나 연회색 옷을 주로 입는다. 야당 리더로서 정권 비판에 열을 올릴 땐 감색 양복에 파란 넥타이를 맨 ‘전투복’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 대표는 자신의 퍼스널 컬러(personal color·개인의 주조색)가 ‘겨울 쿨톤’이라는 전문가 진단을 받았다고 밝힌 적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이미지 컨설턴트는 “겨울 쿨톤은 쨍하게 진한 색이 잘 어울리고, 베이지처럼 옅은 색을 걸치면 창백하고 노쇠해 보일 수 있어 금기인데 (굳이 찾아 입는 게) 이상하다”며 “따뜻하고 착한 이미지로 중도층에 어필하려는 마음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베이지 코트와 재킷이나 티셔츠, 아이보리 터틀넥, 연갈색이나 연회색 후드티 등을 종종 입는다. 한 위원장 역시 차가운 이미지의 검사 출신이자 ‘윤석열 대통령의 분신’이란 논란에서 탈피, 이념 스펙트럼과 지지층을 넓히려 하는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국민의 눈을 사로잡은 극적인 베이지 패션은 축구 국가 대표팀의 손흥민·이강인 선수가 선보였다. 경기 전날 탁구 치지 말라는 주장에게 대들다 손가락을 부러지게 한 하극상에 여론이 들끓자, 이강인이 손흥민을 찾아가 베이지색 티셔츠를 나란히 입고 해맑게 웃는 사진을 공개했다. 몸값 수백억 원의 스타들이 주의 깊게 선정한 ‘대국민 화해룩’, 과연 주문량이 폭주했다.
실수했나 의도했나, 베이지게이트
영국의 문화사학자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책 ‘컬러의 말’에서 베이지로 뒤덮인 공간이나 사람을 “이를 악물고 일궈낸 무해함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누구의 기분도 거스르지 않을 법한 온화한 색이지만, 지루하고 모호하며 때론 진실을 감추고 결단을 미루는 위선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양에선 베이지에 대한 호불호가 크다.
대표적 일화가 2014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소위 ‘베이지게이트(Beigegate)’. 10년이 지난 지금도 미 정가에서 오르내리는 사건이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백악관에 돌아온 오바마가 테러단체 IS 소탕 관련 브리핑을 하는 자리에 밝은 베이지 양복(tan suit)을 입고 나왔다. 야당과 패션계에서 “세계가 지켜보는 미국의 대통령답지 않다” “진지함과 결단력이 결여된 우유부단한 패션” “햄프턴스(롱아일랜드의 부유한 별장촌) 파티에 놀러 가냐”는 십자포화가 쏟아졌다.
오바마의 대선 슬로건 ‘예스 위 캔(Yes We Can·우린 할 수 있다)’을 비꼬아 ‘예스 위 탠(Yes We Tan)’이라고 하거나, 자서전 ‘담대한 희망’을 ‘담대한 회갈색’으로 비튼 조롱도 나왔다. 민주당에선 “로널드 레이건이나 조지 W 부시 등 공화당 대통령들이 베이지 양복을 입을 땐 가만 있다가 흑인 대통령에게만 악의적 트집을 잡는다”는 반격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오바마가 ‘IS 대응에 미 군사력을 쓸지 확답할 수 없다’고 한 것을 두고 진보 성향 뉴욕타임스조차 “미온적인(wish-washy) 정책을 뒷받침하는 미온적 패션”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올드머니룩의 불편한 진실
베이지는 최근 1~2년 새 또 핫이슈가 됐다. ‘올드머니(old money)룩’과 ‘조용한 럭셔리’ 열풍이 일면서다. 대대로 내려온 부(富)를 물려받은 이들이 어깨에 힘 빼고 입는다는 이 패션 트렌드의 대표 컬러는 베이지와 화이트. 명품 로고를 감추고 요란한 색과 무늬를 지양하며, 캐시미어·실크·오가닉 순면 등 고급 소재로 승부하는 은밀한 부(stealth wealth)가 콘셉트다.
사실 베이지 계열 옷은 까다롭다. 재질이 눈에 확 띄는 데다 잦은 드라이클리닝이 필요하고, 잘 관리된 피부와 몸매로 받쳐줘야 하며, 비싼 보석과 시계, 자동차와 가구를 돋보이게 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올드머니룩을 대중이 따라 하게 된 건 코로나 팬데믹 직후, 안락한 생활에 대한 동경이 커지고 명품을 향한 보복 소비가 폭발하면서다. 부유층을 배경으로 한 미 드라마 ‘석세션’과 킴 카다시안·귀네스 팰트로 같은 연예인을 따라 옷과 화장, 인테리어까지 ‘고급스럽고 자연을 닮았으며 정서를 안정시키는’ 베이지와 바닐라 톤이 뒤덮기 시작했다. 아기부터 노인까지 ‘일생의 베이지화(beigefication)’란 말이 나왔다.
평론가들은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뉴욕의 패션 칼럼니스트 스테퍼니 맥닐은 “우아한 베이지의 더러운 진실은, 누군가 계속 닦고 빨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토한 베이지 보디슈트, 커피 얼룩이 밴 크림색 카펫, 땀에 전 아이보리 니트가 어떻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패션’인가”라고 했다.
영국 텔레그래프 패션 전문 기자 로라 크레이그도 “상위 0.1% 부자는 베이지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진정한 특권”이라고 했다.
베이지가 무슨 죄랴
가장 논란이 된 건 육아용품의 베이지화로,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주의(PC)를 띠면서다. 아기들에게 분홍·파랑 대신 베이지 같은 ‘성(性) 중립적’ 옷을 입히고 방을 꾸미는 게 윤리적이고 진보적이란 인식이 퍼졌다. 알록달록하고 저렴한 플라스틱이 아닌, 비싼 원목 소재 장난감과 가구는 기후변화에 맞선 친환경주의와 지속가능성을 상징했다.
그러나 미 아동학계는 “부모의 베이지화에 맞춰 아이들의 원색을 향한 동경을 거세하고 ‘차분함’이란 미명하에 우울감을 안긴다”면서, ‘슬픈 베이지 아기(Sad Beige Baby)’ 양육법을 비판했다. 오가닉 면이나 대나무 섬유 원단에 칙칙한 베이지·연회색 옷을 입은 아이들 사진을 두곤 “19세기 런던 강제노역소의 고아들 같다”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베이지는 여전히 유용하다. 지난해부터 틱톡 등 소셜미디어에선 ‘베이지 깃발(Beige flag)’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데이트 상대의 언행이 부정적이고 께름칙할 때 꺼내드는 ‘빨간 깃발’과 달리, 베이지 깃발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든 온갖 정보에 대한 ‘중립 기어’를 뜻한다. 젊은 층은 무의미하고 소소한 습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슈에 베이지 깃발을 달아 잡담을 나누며 은근히 자신의 취향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도 저도 아닌 것들, 숨기고 싶은 본심과 미뤄둔 판단들. 아무튼 베이지는 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