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최정진

비난을 한 번 받았을 때 얻은 충격을 해소하려면 칭찬을 네 번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가진 힘은 막강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누군가의 평생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가장 열심히 일기를 쓴 때를 꼽자면, 바로 고3 시절이다. 나는 ‘입낳괴(입시가 낳은 괴물)’였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갉아먹는 학생 중 하나였다. 그때 일기장을 다시 열어보면 민망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투박한 자책, 비장한 다짐과 분노. 부정적인 말과 감정이 거친 필체로 남아 있다. 아무래도 ‘글쓰기’라는 것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다 보니, 찐득한 감정을 게워내고 싶은 날에 일기장을 펼쳤나 보다.

지난 한 달 동안 나의 기분을 매일 기록해봤다. 좋음, 중간, 나쁨으로 Y축을 나누고 X축에는 1일부터 31일까지 써 놓으면 그럴싸한 그래프가 완성된다. 여기에 매일매일 점 하나만 찍으면 나의 기분 변화를 알 수 있는 거다.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게 될 것 같은 이 작업은 특이하게도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 더 도움을 준다. 아주 작은 에피소드가 나의 하루를 뒤덮은 채 잠에 들었던 지난날과 달리, 작은 에피소드들과 나의 하루 전체를 분리해서 보게 된다. 광고주와 작은 마찰이 있었다 해도, 내가 미룬 일이 나를 치고 지나간다 해도, 그 하나가 나의 전체를 망칠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는 것.

나는 ‘이상하다. 왜 오늘 기분이 좋지’라고 생각하며 ‘좋음’ 단계에 점을 찍거나,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어’라면서 ‘보통’에 점을 찍었다. 그렇게 일주일 연속 나쁘지 않은 날들이 지속되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던 ‘가설’이 ‘거짓’으로 증명된 실험이었다. 워낙 스스로에게 엄격한 데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사는 편이라, 심리적으로도 늘 ‘좋지 않은’ 상태일 거라고 넘겨짚고 살아왔다. 그런데 막상 ‘실험’해보니, 나는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진 선입견이 기분 좋게 부서졌다. 생리 전후에만 그래프는 기가 막히게 저점을 찍었다. 그 어떤 노력도 호르몬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것 역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생은 스스로를 계속 실험해가는 과정이다. 기분을 기록하는 것 역시,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가설을 실험하는 작업이었다. 요즘 유튜브로 과학 관련 채널을 많이 본다. 감각할 수 있는 ‘팩트’만으로 세상을 논하는 과학자들을 보고 있으면 골치 아픈 의문과 공상이 눈 녹듯 사라진다. 심지어 어느 북 토크에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독자님께 ‘절대 과학 채널을 보지 마세요’라고 조언한 적도 있다(과학과 친해질수록 세상에 대한 의미 부여 능력이 줄어든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

추상적인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되면, 우리의 마음은 안정을 찾는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는 보편적으로 행복한가? 라는 질문도 ‘기분 그래프’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탈바꿈했다. 딱히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은 올곧은 그래프가 그 질문에 대해 실재하는 증거를 내밀어준다. 아, 나 생각보다 즐겁네. 그래프가 내게 “인정하십시오”라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부정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다시 고3 시절을 떠올려 본다. 분명, 기쁨도 많았다. 친구들과 교실 책상에 앉아 꿈을 논하며 먹던 피자. 아이돌 춤을 따라 추던 복도의 커다란 거울. 문제 하나에 울고 웃던 것도 돌아보면 기특하고 아름다울 뿐. 그때도 기분 그래프를 그려봤다면, 결코 ‘나쁨’에 점을 찍을 수는 없었을 거다.

부정적인 기억은 그 힘이 너무 막강하다. 그래서 우리는 긍정적인, 혹은 아무것도 아닌 감정의 편에 더 힘을 실어줘야 한다. 무사히 맞은 밤을 매일 기념하고, 기분이 좋았던 순간이 어땠는지 연구자의 마음으로 샅샅이 기록해야 한다. 아무렇지 않은 날에 일기장을 펴서 밋밋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글을 쓰고 또 써야 한다. 그런 날들의 힘이 쌓여서, 어떤 폭풍을 만나도 폭풍의 눈을 찾아갈 감각을 갖추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