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 제우스

“결승전 MVP는 제우스 선수입니다.”

지난 11월 19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2023리그 오브 레전드(LOL·롤)’ 결승전. Z 세대의 월드컵, ‘롤드컵’으로 불리는 이 대회 최고 선수는 19세 제우스였다. 현장에 있던 1만8000명은 그의 본명 최우제를 외쳤다. 광화문에서 거리 응원을 하던 1만5000명, 전 세계 인터넷 동시 접속으로 1억명이 지켜봤다. 롤드컵 누적 시청자수는 4억명이었다.

(항저우(중국)=뉴스1) 민경석 기자 = 29일 오후 중국 항저우 베이징위안 생태공원 내 e스포츠 주경기장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경기 리그 오브 레전드(LoL) 대한민국과 대만의 결승전에서 승리해 금메달을 목에 건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이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제우스(최우제), 카나비(서진혁), 쵸비(정지훈), 페이커(이상혁), 룰러(박재혁), 케리아(류민석). 2023.9.29/뉴스1

앞서 2개월 전, 그는 또 한 번의 영광을 맞이했다.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다. 남들은 평생 목표로 삼는 두 가지를 10대에 모두 이룬 소년이었다.

◇다시 도전자로

2024년 갑진년, 스무 살이 됐다.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T1 본사에서 만난 그는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사진 촬영에도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더분한 더벅머리. 바쁜 지금도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한다는 그가 말했다. “지금이 제일 위험한 시기죠. ‘크게 기뻐하지 말고 할 거 해야지’라는 느낌이 있어요. "

2023 리그오브레전드 월즈 파이널 MVP 제우스 /라이엇게임즈

“오늘까지만 세계 최고라는 기분을 즐기고, 내일 다시 도전자로 돌아가겠습니다.”

MVP를 받던 순간 제우스는 의연했다. 쑥스러운 듯 머리를 한 번 슬쩍 긁고 차분하게 소감을 말했다.

-결승전 MVP 예상했나요?

“경기가 잘 풀려서,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어요. 한번쯤 타보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받아 아직 좀 얼떨떨해요.”

-소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그날 아침에 소감을 준비하긴 했는데 그 말은 즉흥적으로 떠올랐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어린 나이에 많은 걸 이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살 날도 많고 앞으로 잘 안 될 수도 있으니. 너무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에.”

T1은 언제나 강력한 우승 후보팀이었다. 살아 있는 전설 페이커(이상혁)가 있고, 최다 우승팀 기록도 있다. 그것은 2016년 이후 멈췄다. 2022년 롤드컵을 포함해 국내 리그까지 5연속 준우승. 팬들 사이에서는 ‘결승전 트라우마’라는 말도 나왔다. 하물며 선수들은 어땠을까.

2022 리그오브레전드 월즈 파이널에서 제우스 /라이엇게임즈

-결승전 마인드 컨트롤은 어떻게 했나요?

“계속 준우승한 것은 ‘사고’라고 생각했어요. 2022년에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면 안 된다’고 했다면 2023년에는 ‘우리가 준비한 것만 생각하고, 오늘 할 것만 잘하자’고 했지요. 승리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질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니, 좀 더 편하게 게임을 한 것 같아요.”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롤드컵 우승 중 언제가 더 기뻤나요?

“둘 다 너무 값지고 기쁜 일이지만, 금메달은 ‘롤’을 모르는 분들한테도 전해진 것 같아 값지게 느껴졌어요.”

-국가대표라는 어떤 자리인가요?

“‘팀원들한테 짐을 실어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자리. 금메달을 따고 싶은 마음이 커서, 하루 하루가 ‘너무 힘들다’고 느낄 정도로 힘든 일정이었어요. 돌아보니 다 추억인 것 같습니다.”

프로게이머 제우스

롤은 연봉이 높기로 유명하다. 페이커는 70억원대, 다른 정상급 선수는 10억원 안팎을 받는다. 중국 리그에 진출하면 단위가 달라진다. 선수 생명이 짧고, 한국 리그는 샐러리캡(연봉 상한)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제우스가 중국으로 떠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그를 비롯해 T1 선수 전원이 재계약에 성공했다. 굉장히 드문 일이다.

-T1과 재계약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저도 이번이 첫 FA라 혼란스럽고 힘들었어요. 거의 떠나기 직전까지 갔는데, 극한의 상황이 되니깐, 제 속마음이 나오는 거 같더라고요.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서. 익숙하고 편한 걸 좋아하는 것도 있고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어요. 옛날부터 한국 팀이 중국 팀한테 지는 걸 보면 마음이 아파, 한국 리그에서 오래 뛰고 싶다는 마음도 컸고요.”

2023 리그오브레전드 월즈 8강에 선글라스를 끼고 온 제우스 /라이엇게임즈

-이번 롤드컵 8강 때부터 입장할 때 선글라스를 착용했는데.

“국제대회에서 입장할 때는 언론에서 사진을 찍거든요. 어쩌다 보니까, 8강 때 한국팀이 다 떨어졌고 저희가 마지막 팀인데, 팬 분들이 ‘제발…’ 이런 느낌이라 긴장 풀어 드리려 소소한 이벤트로 준비했는데 결과가 잘 나오다 보니 루틴이 돼버렸어요. 안 했다가 질까 봐 계속했습니다(웃음).”

-다른 루틴은요?

“옛날에는 검은색 양말 고집하고 그랬던 게 있었는데, 요즘은 따로 없는 것 같아요.”

-경기 전 마음가짐은?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려고, 근거들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아요. 생각이 많아지긴 하는데, 막상 경기 들어가면 제가 집중해야 할 것들이 보여서. 열심히 합니다.”

2023 리그오브레전드 월즈 파이널 우승한 T1 /라이엇게임즈

-올해 T1은 롤드컵 8강 전까지는 주목받는 팀은 아니었는데요.

“그런데 왠지 모르겠는데 저는 롤드컵 우승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진짜 실제로 우승하니깐 모든 게 값진 경험이 됐지요.”

-올해 목표는 골든 로드(전 대회 우승)인가요?

“그거는 크게 욕심 없고요. 가능한 많은 걸 따고 싶습니다.”

◇힘들었던 연습생

T1은 2018년부터 ‘T1 아카데미 루키즈’ 유스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롤의 ‘라 마시아(축구 FC 바르셀로나의 유스 시스템)’로 부를 정도로 훌륭한 선수를 양성했다. 앞서 페이커 선수가 게임 중 메시지를 받아 데뷔했다면, 제우스는 공식 오디션으로 입단해 연습생을 거쳐 프로가 된 사례다.

-태어나 처음 접한 게임이라면.

“5살 때 카트라이더와 크레이지 아케이드요.”

-영어유치원을 다녔다던데.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웃음) 엄마가 다녔다고 하시더라고요.”

-T1 아카데미는 어떻게 입단하게 됐나요?

“2019년에 입단 조건을 봤어요. 저한테 유리하더라고요. 직접 찾아갔어요. 합격하고, 바로 합숙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계속 테스트를 봤지요.”

-합숙 생활은 어땠나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저로 우뚝 서지도 않았고, 흔들렸던 시기죠. 이룬 게 없으니까. ‘내가 잘 못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많이 하고, 운이 안 좋았으면 포기했을 수도 있어요. 처음 1년은 조용히 칼을 갈았습니다. 훈련하고 경쟁하면서. 2020년 여름부터 상승세를 많이 타 1군에 입성했습니다.”

프로게이머 제우스

-1군에 오니 어떻던가요?

“다들 기대도, 걱정도 많았는데, 저도 똑같은 상황이었어요. ‘되게 잘한다’고 할 확신은 없었어요. 그냥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 오고 나서도 적응을 잘 못했어요.”

-어떤 부분을요?

“게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도 해야 하고, 일상에서 대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개인 방송을 보면서 의연하게 잘한다고 생각했는데요.

“방송이 익숙하지 않아서 제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던 거 같아요. 모니터와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악플을 보는 스타일은 아니고요.”

프로게이머 제우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나요?

“처음에는 아빠가 되게 반대했어요. 게임을 잘 모르니까 ‘못 믿겠다. 이상한 데 아니냐?’ 하고. 그런데 제 형은 게임을 좋아해서 잘 알거든요. 형이 밀어줘서 설득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반응은요?

“크게 반대는 안 했어요. 제가 게임 말고는 다른 재능을 잘 못 찾았기 때문에,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니었고요.”

-게임명 ‘제우스’도 어머니가 추천해줬다고.

“원래는 본명을 썼는데, 약해 보인다고 해서 바꿨어요. 엄마와 코치님이 잘 어울린다고 추천해주셔서. 조금 오글거리기는 했는데, 느낌이 좋다고 해서.”

프로게이머 제우스

-연습생 모두가 1군 되는 건 아닐 텐데요.

“그때는 8명 같이 생활했으면 1군 하는 선수는 한 3~4명이었어요. (연습생 기간을 묻자) 1년 반 정도요.”

-일과가 보통 어떻게 됩니까.

“신체 훈련이 없어 절대적으로 연습시간이 긴 편이에요. 보통은 11~12시간, 많게는 14~15시간씩 하죠.”

-본인은 천재인가요, 아니면 노력으로 이뤘나요?

“재능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싶지만, 많이 망가지면서 올라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연습을 하면서 ‘왜 이렇게 못 하지?’ 하는 순간이 많았어요.”

-본인만의 훈련 스타일이 있다면요?

“롤은 많은 챔프를 익힐수록 좋아요. 저는 하루에 하나씩만 쭉 파요. 하다 보면 ‘감 잡았다’는 느낌이 와요. 그런 느낌이 안 올 때는 잠시 안 보고 있다가, 오랜만에 하면 또 잘 될 때가 있더라고요.”

-게임이 잘 안 풀릴 때는 어떻게 하나요?

“지금처럼 열심히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할 말 하는 막내

롤은 팀 게임이다. 탑·정글·미드·바텀·서포터 등 각자의 포지션에서 140여 명의 챔피언 중 자신의 플레이와 다른 멤버들의 조합이 잘 맞는 챔피언을 선택해 경기한다. 빠른 게임 진행 속도상 다섯 명의 의사 결정이 중요하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가 선호되는 이유다.

전원 재계약에 성공한 T1. 2023 리그오브레전드 월즈 파이널에서 우승하던 모습. /라이엇게임즈

-할 말은 하는 성격으로 유명한데.

“되게 낯을 가리고, 말을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형들이 먼저 다가와서,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게임 할 때는 나이든 뭐든 어떤 불편함이 느껴지면 경기력이 떨어지거든요.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이상적이에요. 막내지만 당당하게 의견을 냅니다.”

-페이커 선수는 어땠나요?

“처음엔 연예인 보는 느낌이었어요. 접근하기 어려운 대선배라 같이 게임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괜찮아지더라고요. 지금은 저를 다잡게 해주는 형이에요. 늘 꾸준히 노력하는 게 신기할 정도죠. 그러면서도 가끔 엉뚱하고, 농담도 열심히 하려고 하고.”

-다른 팀원들 첫인상은요?

“현준이형(오너)은 워낙 아카데미 시절부터 오래봤으니깐 친했고, 민석이형(케리아)은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만나 ‘화면이랑 비슷하게 생겼다’면서 신기해 했어요. 민형이형(구마유시)도 아카데미에 잠깐 있었지만, 크게 겹치지는 않아서 그냥 좀 무서운 형, 원래 이미지는 엄격하고. 그런데 금방 친해지더라고요. 시간이 다 해결해주는 것 같아요.”

-전원 재계약했는데요. 팀워크가 좋다고 느낀 순간은요?

“저희는 5명 다 성격도 다르고, 개성도 많이 튀다 보니, 정말 재미있어요. 메뉴 선정할 때도 자기 할 말 다 하고. 좀 뻔뻔한 성격이지만, 또 남의 말은 잘 들어주는 스타일이라, 팀으로는 좋은 거 같습니다.”

프로게이머 제우스

-구설수도 없이 게임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데.

“제가 잘해서라기보다 운이 따라준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 덕이죠. (인터뷰용 멘트라고 하자) 제가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없어서요”

-일본 야구선수 오타니는 ‘만다라트’로 계획표를 짠다고 해요.

“그분은 MBTI(성격유형검사)가 J(계획형)인가 보네요. 저는 계획 세우는 걸 안 좋아해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평소 쉬는 날은 뭐하나요?

“요새 쉬는 게 좀 힘든 것 같아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프로게이머 하길 잘했다 싶은 순간을 묻자) 2022년 여름 토트넘 내한 때 손흥민 선수 만났을 때요. 원래 축구도 좋아해서.”

-요즘 롤 말고 관심 있는 것은?

“고양이요. 나중에 은퇴하면 시간이 많으니까 고양이 한 마리 키우고 싶어요.”

-은퇴하고 지도자는 생각 없나요?

“저는 못할 것 같아요. 남을 가르치는 게 성향상 적합하지 않은 듯요.”

-만약 결혼하고 자녀가 게임을 하겠다고 하면?

“하고 싶어하면 시킬 것 같습니다.”

-포지션으로 탑라이너를 맡고 있는데요.

“원래는 미드였는데, 어쩌다 보니까 탑을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좀 천대받는 라인이에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고, 욕은 많이 먹고. 공수 다 하면서 커버해야 하는 영역도 많아요. 축구에서 윙어와 비슷해요. 한 가정의 아버지처럼 외로운 자리지만, 경기가 잘 풀렸을 땐 뿌듯함도 큰 것 같아요.”

-롤은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까요?

“가끔 망상을 해요. ‘앞으로 뭐 먹고 사나.’ 선수들이 더 재미있는 리그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2019년만 해도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할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대통령이 축전을 보낼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는데요.

“저도 상상도 못 했어요. 추운 날씨에도 광화문 거리 응원을 나오는 걸 보고 ‘엄청난 열기구나’ 싶었습니다. 시대를 잘 타고 난 것 같아요.”

-게임을 스포츠로 보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게임 대회를 보면서 재미를 느꼈고 영감을 얻었어요. 프로가 된 후에는 팬들이 저로부터 그런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길 원해요. 경기를 통해 그런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는 게 스포츠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제가 게임을 정말 좋아했던 이유는 잘했기 때문이에요. 정말 자신 있다면 과감하게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2023 리그오브레전드 월즈 파이널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T1의 제우스 /라이엇게임즈

-어떤 선수가 되고 싶나요?

“연습생 때는 선망하는 선수가 있었어요. 그들처럼 빛나고 싶었죠. 지금은 꾸준한 선수가 되고 싶어요. 제가 프로 데뷔한 지 2년밖에 안 돼요. 어릴 때 잠깐 빛났던 선수들이 사라지는 걸 많이 봤거든요. 오랫동안 반짝일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그 순간 제우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2의 페이커’라는 호칭에 대해 “좋은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지만, 그건 나중 일인 것 같다. 지금은 천천히 쌓아 올리겠다”고 했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아무튼 주말 - T1 제우스 선수 인터뷰_ 영상미디어 김용재 (아무튼 주말 개제 전 사용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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