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1월 음력설 연휴를 앞두고 대구의 한 유치원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윷놀이 체험을 하고 있다. /뉴스1


대기업 중역 출신인 70대 A씨는 수년 전부터 매년 1월 1일 신정 설을 쇤다. 음력설을 쇠던 양친이 별세한 뒤, 자기가 주관하는 설은 양력설로 바꾼 것. 자녀와 손주들에게 “신정 하루만 모여 세배하고 떡국 먹자. 구정엔 너희끼리 여행을 가든 쉬든 각자 볼 일 보라”고 했다. A씨는 “우리 부부도 긴 연휴에 자식들 언제 오나 기다리며 집 지키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새해를 두 번 맞는다. 양력설은 하루, 음력설은 사흘 쉰다. 그럼 까치까치 설날은 대체 언제인지, 우리우리 설날은 왜 두 번인지, 떡국 두 그릇 먹으면 두 살을 먹는 건지, 아이들은 매년 묻는다. 어른들도 묻기 시작했다. 설날은 꼭 둘이어야 할까? 각 가정과 기업 현장에선 “구정에 차례를 지내는데 신정에도 어른들 찾아뵈어야 할지 헷갈린다” “본가·처가가 다른 새해를 쇠니 꼼짝 못 한다” “직원들에게 신정·구정 연휴를 다 챙겨주는 게 부담 된다”는 말이 나온다.

묵은해를 두 번 보내고 새해도 연거푸 맞는 ‘이중 과세(過歲)’를 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시피 하다. 약 100년에 걸친 양력설과 음력설 갈등과 타협이 낳은 독특한 산물이다.


고종의 을미개혁을 시작으로 일제시대, 그리고 군부 시절에 이르기까지 100년 가까이 한반도의 지배층은 새해를 두 번 치르는 '이중과세'가 전근대적 낭비라는 인식 때문에 음력설을 규제해왔다. '양력으로 새해를 맞으라'는 엄명이 내린 1959년 1월 1일 설빔을 차려입고 거리에 나선 아동들. 그러나 민간에선 꾸준히 음력설의 전통이 이어져오며 저항의 의미까지 띠었다. /조선일보DB


우리가 음력설을 지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부터 나온다. 1895년 고종 황제가 을미개혁을 단행하며 태양력을 도입했고, 이듬해부터 1월 1일에 신년 하례를 받았다. 딱히 민간에서 쇠는 음력설을 규제하진 않았다.

앞서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 때 음력설을 없애고 중화권에서 탈피했다. 조선을 강점한 뒤엔 한민족 결속을 무너뜨리고 내선일체를 이루려 자신들처럼 신정(新正)을 쇨 것을 강요했다. 일제는 음력설을 비하하는 표현인 구정(舊正)에 방앗간을 못 돌리게 하고 설빔에 먹물을 뿌렸다. 조선인들은 양력설을 ‘왜놈 설’이라 부르며 독립운동 하듯 음력설을 지냈다.

정부 수립 후에도 한동안 신정만 사흘 연휴를 줬다. 전쟁의 폐허를 떠안은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는 이중 과세가 허례허식이라 경제 발전과 근대화에 방해 된다며 음력설을 규제했다. 그러나 민간에선 끈질기게 구정에 가래떡을 뽑고 성묘를 했다. “신정은 명절 기분이 안 난다”는 정서가 지배했다.


지난 1989년 2월 구정 설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귀성객들이 차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역 광장을 메우고 있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음력설에 사흘 연휴를 주면서, 음력설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양력설의 지위를 명실상부하게 넘어섰다. 당시 국민들은 '이제야 우리 명절을 되찾았다'는 기쁨에 들떴다. /조선일보DB


전두환 정부는 1985년 음력설에 ‘민속의 날’이란 이름을 붙여 명절에 준하게 인정하고 하루 휴무를 줬다. 기업들은 ‘설날’이 아닌 ‘민속의 날’에 귀향하는 직원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장기 휴일과 상여를 줬다. 결국 노태우 정부가 1989년 양력설에 이틀 휴무, 음력설에 사흘 휴무를 주면서 두 설날의 지위는 명실상부 뒤집혔다. 당시 신문들은 “80여 년 만에 되찾은 설”이라며 광복을 맞은 듯한 국민의 기쁨을 전했다. IMF 사태 후인 1999년 김대중 정부는 이중 과세의 낭비를 더 줄이겠다며 신정 휴일을 하루로 줄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렵게 지켜낸 음력설이지만, 장기간 정·재계에서 공식 설로 자리 잡은 양력설의 지위도 만만치 않다. 삼성·현대·LG·SK 등 4대 재벌 일가는 모두 신정을 쇤다. 세계 주요국이 바쁘게 돌아가는 연초에 우리만 음력설로 멈춰서는 것이 세계적 경영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도 작용한다.

전통적 부자와 공무원 집안이 신정 쇠는 것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 2021년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양력설을 쇤다”고 하자 진보 진영의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일제가 강요한 신정을 쇠는 극우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지난해 캐시 호컬 미국 뉴욕주지사가 아시아계 공직자 등과 함께 공립학교의 자체 공휴일에 음력설(Lunar New Year)을 추가하는 내용을 담은 법에 서명하는 모습. 이어 12월 유엔도 음력설을 유동적 공휴일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음력설의 종주국인 중국은 "국제사회가 (미국에 맞선)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뉴욕주 홈페이지


현재 음력설을 대대적으로 쇠는 나라는 중국과 베트남, 한국 정도다. 지난 연말 유엔이 ‘음력설(Lunar New Year)’을 ‘유동적 공휴일’로 지정하자, 중국 정부는 “유엔이 중국 문화의 영향력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 등 아시아계 인구가 많은 도시도 음력설을 자체 공휴일로 정했다. 중국계는 ‘중국설(Chinese New Year)’이란 이름을 고수한다.

우리 내부에선 또 변화가 일고 있다. 새해를 맞는 의식은 신정에 간단히 치르고, 긴 구정은 재충전 시간으로 삼는 이가 많아졌다. 한 대형 마트 집계에 따르면 5년 전부터 신정 기간 떡국 떡 매출이 구정 떡 매출을 뛰어넘었다. 구정 연휴마다 외국 여행을 떠나는 인파로 공항은 미어터진다. 1인·비혼·무자녀 가구가 늘면서 구정이라는 전통 설날에서 ‘독립’하려는 세대가 급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