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지역 도시에서 독자와의 만남이 있었다. 흔히 ‘북토크’라고 불리는 이 모임은 작가가 독자들 앞에서 책을 소개하고, 글쓰며 경험한 일들과 감정을 풀어놓고, 질의 응답 및 사진 촬영에 이어 책에 사인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찾아준 10명 남짓의 독자들은 앞뒤 없이 떠들어대는 나를 인내심 있게 지켜봐주었다.
모든 순서가 끝난 후 어떤 독자가 다가와 내가 쓴 책에 사인을 요청하며 말했다. “저 작가님 책 다 읽었어요. 조용히 응원하고 있었어요.” 그 말에 대답했다. “왜 조용히 응원하셨어요.” 또 다른 독자가 내민 편지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작가님의 숨은 팬 드림.’ 편지를 고이 접으며 생각했다. 다들 숨어 계셨구나. 그래서 내가 몰랐구나.
독자들로부터 ‘숨은 팬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나의 팬들은 왜 다들 숨어 있는가. 나는 정녕 몰래 응원해야만 하는 사람인가. 이 모든 생각이 자의식 과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기애가 강한 데다 자의식 과잉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써서 세상에 발표하지 않는다. 이 마음(!)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발행된 종이책은 6만1181종, 부수로는 총 7291만992부(대한출판문화협회 2022년 납본통계)에 이른다. 하루에 약 167종, 약 20만 부의 책이 시중에 쏟아졌다. 전자책과 독립출판물을 합치면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판매 현황은 예상을 밑돈다. 2022년 전국 1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서적 구입비는 1만254원(통계청 가계동향조사)으로 집계되었다. 종이책 한 권 가격이 평균 만 원은 넘는 물가를 감안하면, 대부분의 가구가 석 달에 한 권 정도 책을 사서 본다는 이야기다. 반면 커피에는 그 이상의 돈을 쓴다. 대한민국 성인 10명 중 7명은 하루에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고, 한 달 평균 커피 구입비로 10만3978원을 쓴다(월간소비자 2022년 10월호).
고백한다. 나만 해도 밥 먹고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지만, 밥 먹고 책을 읽으면 소화가 더 안 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밥 먹고 커피 한잔 할까?’ 하면 했지 “우리, 책 읽으러 가지 않을래?”라고 말하지 못한다. 가뜩이나 없는 친구 더 없어질 걸 아니까. 하물며 작가도 이 정도이니 책 읽는 사람은 점차 희귀해진다. ‘재미있는 게 이렇게 많은데 책을 읽어?’ 하고 별종 취급받을 때도 있다. 그래서 더욱 조용히 책을 읽게 되고, 책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내향성을 바탕으로 점점 ‘숨은 팬’이 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느새 책은 관심 밖의 콘텐츠가 되었다는 뜻이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에는 TV 예능 작가로 10여 년을 일했다. 일주일에 한 편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의 성적표는 방송 다음 날 발표되는 시청률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피부로 다가온 건 거리의 반응이었다. 한때 시청률이 30%에 육박한 TV 프로그램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방송 다음 날 밖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그 프로그램에 대해 말하는 게 들렸다. “어제 그거 봤어? 엄청 웃겼는데” 하며 유행어를 따라 하기도 했다. 출판계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길을 가다 우연히 자신이 쓴 책을 읽는 사람이 보이면, 그 책은 이미 대박 난 거라는 얘기. 하지만 나는 17년째 이 일을 해 오면서도 내가 쓴 책을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요즘은 책 읽는 사람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작가인 우리가 잘하자?’로 마무리된다.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면, 자연히 독자들이 모일 거라는 해맑은 결론 말이다. 하지만 작가들이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 새해를 맞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만약 응원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의 책을 정가로 사주셨으면 좋겠다. 좋은 책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조용히 숨은 팬 하지 마시고, 좋은 것은 좋다고 적극적으로 소문내 주셨으면 좋겠다. 서점에 리뷰 달기, 소셜미디어에 독후 감상을 올리는 일도 환영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침체된 출판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더불어 독자들의 피드백에 힘을 얻어 나 같은 작가는 오늘도 한 줄을 더 쓰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내 책은 비록 베스트셀러가 못 되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많이 나오는 출판계를 소망한다. 많은 이들이 독서를 즐기고 책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일이 더는 ‘오글거림’이나 ‘지루함’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전국의 숨은 팬들에게 외치고 싶다. “아니, 죄지으셨어요? 나오세요! 나와서 당당히 외치세요! 나 이 작가를 좋아한다고! 이 책이 재미있다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통 모르시겠다면, 서점에 가셔서 물어보세요. 혹시, 김신회 작가 책 있나요…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